
무슨 일이든 정성이 깃들지 않으면 감동을 줄 수 없다. 정성은 달리 사랑의 품격을 드러낸다. 온갖 정성이 담긴 것이 바로 어머니의 마음이다. 자녀들에게 온전히 헌신하는 사랑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라도 어머니의 마음으로 모든 이를 대할 수 있다면, 그야말로 가장 따뜻하고 자비로운 모습이 아닐까 싶다.
그 모습을 가난 속에서도 팔 남매를 꿋꿋이 키워내시던 어머니에게서 봤다.
몇 해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의 사랑에 대한 그 추억은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또렷하다.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생애를 정성껏 살아낸 어머니가 있었기에 나 역시 주어진 고난을 잘 극복할 수 있었다. 말없이 올곧게 사랑으로 훈육하고 지켜주던 부모야말로 자식들의 미래의 모습인 까닭이다. 그래서 어느 가정이든 부모의 모범을 따라 자식들은 자라게 마련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가톨릭교회에 성모님이 계시다는 것, 곧 성모 공경이야말로 어떤 종교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아름다움이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 어머니가 아니고선 채워질 수 없는 모성적 사랑이야말로 보편적 사랑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하느님은 사랑’이라는 말을 들을 땐, ‘하느님은 어머니’라는 생각을 떠올리기도 하는데, 그것은 사랑의 완전성이 모성적 사랑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어머니의 마음은 나 자신으로부터 모든 개인과 가정, 종교, 더 나아가서는 하느님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사랑의 범주를 넓혀주기에 나는 지금도 어머니를 떠올리면 저절로 성모님에 대한 정성과 기쁨 속으로 스며들곤 한다.
그러고 보면 나의 시는 성모 성심에 안겨들고 나서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갔다. 어머니의 모성을 지니면 지닐수록 더욱 심금에 닿는 시의 본질을 깨닫게 되면서다. 시를 어머니의 정성같이 다듬어야만 감동의 울림을 머금게 된다는 확신을 가지게 됐기 때문이다.
성모 성심은 나에게 신앙과 시를 한 물결로 출렁이게 하는 바다와도 같다. 하느님을 향한 나의 믿음과 시심을 무한히 따뜻하게 안아주면서 어떤 환경 속에서도 끊임없이 문학의 길을 천착할 수 있게 해줬다.
고통스럽다고 여기면, 세상보다 고통스러운 데가 없다. 아름답게 보면 세상보다 더 아름다운 데가 없다. 어머니의 마음을 잃어버린 삭막한 세상이 있는가 하면, 만사를 어머니의 모성으로 감미롭게 끌어안는 아름다운 세상도 있기에, 내 시가 어디로 가야 할지도 분명해졌다.
우리는 지금 ‘성모 시대’를 살고 있다고 난 생각한다. 예수님과 사도들이 세상을 떠난 뒤 1531년 겨울에 최초로 발현하신 과달루페 성모님을 시작으로 루르드와 파티마, 반뇌 등지에서 거듭 나타나시는 성모님을 통해 성모님과 함께 천국에 갈 수 있다는 희망이 확연해졌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마음인 성모 성심에 안겨 영생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엄마 품에 안겨 있는 아기의 그것과 다를 것이 없다.
성모님께 드리는 사모곡을 800편이 넘는 시로 써서 그중 240편을 쌍가락지처럼 두 권의 시집으로 묶어 봉헌하기도 했던 것도 그 기쁨 덕이었다. 불과 1년 반 만에 그 시를 다 쓰고 시집을 봉헌할 수 있었던 것도 오로지 은총으로 과달루페 성모님을 만났던 후안 디에고의 기쁨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성모님의 기적으로 한겨울 테페약 언덕에 피어난 각색의 카스티야 장미꽃같이 쏟아져 나온 그 은총의 선율을 생각하면 지금도 기쁨이 차오른다. 성모 성심, 곧 어머니의 마음이 내 시에서 장미 향으로 풍겨 나온 기쁨이 성모님의 환한 미소인 듯, 이 순간에도 내 시심 안에 가득 깃든다.
출처: 가톨릭평화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