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죽고 싶은 때가 있었다. 앞이 막혀 더 나아갈 여지가 없었다. 맥이 풀리고 살고 싶다는 의지도 생기지 않았다. 그런 날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고 보면, 지난 세월은 절망과 희망이 점철된 역정이었다. 초등학교 졸업 뒤 농사를 짓다 결국은 고향을 떠났다.
빈손으로 가난과 절망을 대면하고 살면서 문학을 독학해온 세월은 지금 생각해도 참 아찔하다. 학력이 없으므로 어디다 이력서 한 번 내밀 수도 없었다. 막노동판을 전전하면서 추위와 굶주림과 고독을 견뎌야 했다. 벼랑 끝을 걸어온 셈이었다.
배가 고파 수돗물로 목을 축이기도 했다. 도심 건물 계단에 앉아 창으로 스며든 불빛에 비춰가며 책을 읽다 잠든 적도 있다. 한겨울 공사장 콘크리트 바닥에다 스티로폼 한 장 깔고 낡은 이불을 덮고 누워 냉기가 살을 파고드는 추위를 견디느라 떨며 시를 쓰기도 했다.
그러다가 하늘의 별빛도 추워 보여 가슴에 안고 잠들기도 했다. 안전사고로 중상을 입고 병원에 실려가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병실 창밖에 눈 내리는 모습을 보며, 어쩌면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갈 수도 있다는 실의에 빠져 말없이 울기도 했다. 지난 일들을 짧은 지면에 담기에는 아득할 뿐이다.
지나고 보니 고통은 나의 스승이었다. 고통이 내 인생을 깨우쳐 주면서 죽음의 유혹을 물리쳐 주지 않았다면, 나는 벌써 이 세상에 없었을 것이다. 고난 속에서 죽을 고비를 견디면서, 세상에는 행운도 고난도 도처에 있음을 깨달았다. 고통은 자비의 영역이었다.
고통의 보폭을 따라 걸으며, 고통이 오히려 나를 성장시켜 준 은총임을 깨달았다. 고통이 깨우쳐 주었기에 오히려 모든 생명을 연민의 눈으로 소중히 바라보게 됐다. 죽음을 앞둔 실존을 꿰뚫어보면서 어차피 죽음이 오기 전까지는 절망을 견디고 이겨내려는 의지를 가짐으로써 고난의 값진 삶을 잃지 않으려 애썼다. 내 고통이 밝힌 빛이 바로 내 영혼의 등불이기에 그것을 쉽게 절망과 죽음에 내어줄 수 없었다.
무엇보다 고난은 나에게 인내심을 가르쳐 줬다. 주님의 십자가를 깨우쳐 주었고, 근심 걱정에 사로잡히기 쉬운 약한 의지를 강하게 만들어 줬다. 한목숨이 은총이라는 초연함을 지니게 해주면서, 고통을 기쁨으로 바꿔 주는 주님께 대한 강한 믿음을 갖게 해줬다.
주님과 함께 사는 한 어떤 경우든 절망할 필요도, 미리 죽을 필요도 없었다. 주님 안에선 이미 절망도 죽음도 내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고통이 그토록 내 몸과 마음과 영혼을 맑게 닦아 줬기에, 나는 이토록 큰 은총 안에서 시를 쓰고 있는 것이니, 세상에 미천한 것이 어디 있으랴. 하느님이 주신 희망을 누가 함부로 저버릴 수 있으랴!
사실 고통을 피하려고만 하면, 의지를 강하게 할 수가 없다. 고통의 스승이 깨우쳐 주려고 하는 진정한 삶의 가치를 받아들이지 못하면, 안일한 이기주의에서 벗어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희생이 영생’이라는 비결을 알지 못하고서야 어찌 품은 뜻을 이룰 수 있겠는가.
알고 보면 사랑도 고통과 슬픔을 먹고 자란다. 그렇지 않고는 참된 희생의 가치를 모른 채, 자기중심적 허상에 빠져 사랑도 용서도 못 하는 어중간한 사람이 되고 만다. 오히려 죽기 아니면 살기로 고통을 정면으로 받아들이면서 꿈을 이뤄가는 사람이 되기 위해 안간힘을 쏟았던 세월이 지금은 거울처럼 명징하게 나를 비춘다. 얼마나 힘들었던가! 하지만 생각할수록 나 자신이 대견하고, 주님 앞에서 기쁘고 고마운 세월이었다.
출처: 가톨릭평화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