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단상] 192. 아, 산티아고

백형찬 라이문도 서울예술대 교수
백형찬 라이문도 서울예술대 교수

 

내 연구실 한쪽 벽에는 유화 한 점이 걸려 있습니다. 그림 속 하늘에서는 흰 구름이 두둥실 흘러갑니다. 저 멀리 푸른 산은 어머니 품속처럼 아늑합니다. 길은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산기슭을 돌고 있습니다. 길을 걷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향기로운 바람만 불어오고 있습니다. 진홍색 양귀비꽃이 지천으로 피어 있습니다.

이 그림이 내게 오게 된 데에는 사연이 있습니다. 수원교구에서 운영하는 한 복지시설에 후원했습니다. 그곳에서 매월 소식지를 보내왔습니다. 어느 날, 봉투를 뜯었더니 소식지 표지에 아름다운 풍경 그림이 있었습니다. 직감적으로 산티아고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역시 그림 제목은 ‘산티아고 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림을 바라보니 마음이 푸근해집니다. ‘저 그림을 내 연구실에 걸어놓고 매일 보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림 밑에는 작은 글씨로 ‘이 그림을 판매합니다. 판매 수익은 장애인 작업장을 위해 사용합니다’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어떤 착한 신자가 자신의 작품을 기꺼이 내놓은 것입니다. 작가의 경력을 보니 화려했고, 값이 꽤 나갈 것 같았습니다. 나는 그림을 오려서 책상 앞에 붙여놓았습니다.

시간이 꽤 흘렀습니다. 어느 날, 그림을 보다가 갑자기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복지시설로 전화를 걸었습니다. 조심스럽게 “산티아고 그림 팔렸나요?”라고 물었더니 아직 팔리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다시 작은 소리로 “작품의 가격은 얼마인가요?”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림값은 생각 이상으로 꽤 높았습니다. 나 같은 월급쟁이가 소장하기에는 어림도 없었습니다.

꼭 갖고 싶은 마음에 용기를 내어 작가와 통화를 했습니다. 전화로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갔습니다. 그림은 산티아고를 순례하며 그린 것이고 얼마 전에 전시회도 열었다고 했습니다. 그림을 갖고 싶다고 ‘애절하게’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내가 원하는 액수에 기꺼이 맞춰주었습니다.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연거푸 했습니다.

작품이 오기를 무척이나 기다렸습니다. 성탄절 다음 날이었습니다. 드디어 큼지막한 소포가 도착했습니다. 포장 박스를 열어보니 표지의 그림이 방긋 웃고 있었습니다. 녹색으로 가득 찬 아름다운 그림이었습니다. 그림에서 풍기는 테라핀 기름 냄새도 너무 좋았습니다. 그림은 마치 하느님께서 성탄절에 내게 보내주신 특별한 선물 같았습니다.

산티아고는 가톨릭 신자들의 버킷 리스트에 들어 있습니다. 나 역시 761㎞의 산티아고 순례를 늘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림을 받은 후로 산티아고에 대한 생각이 더욱 깊어졌습니다. 어느 신부님 말씀대로 ‘성지순례는 가슴이 떨릴 때 가야지 다리가 떨릴 때 가서는 안 된다’는 말도 잘 명심하고 있습니다. 내 책꽂이에는 코엘료의 「순례자」를 비롯해서 산티아고 경험을 담은 책들이 꽂혀 있습니다.

‘피레네 산맥, 생장, 레온, 콤포스텔라, 부엔 까미노, 올라, 알베르게’ 이런 말만 들어도 가슴이 설렙니다. 산티아고를 다녀온 사람만 만나도 심장이 뜁니다. 요즘에는 가리비 조개껍질만 보아도 산티아고 생각이 납니다.

마치 정철의 ‘관동별곡’처럼 ‘강호(江湖)에 병이 깊어 죽림(竹林)에 누웠더니’ 같습니다. “이 길은 나를 무너뜨리는 동시에 일으켜 세운다.” 영화 ‘나의 산티아고’에 나오는 말입니다. 이 멋진 말을 체험하기 위해서라도 산티아고에 가야겠습니다. 그림 속의 양귀비가 어서 오라고 손짓합니다.

출처: 가톨릭평화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