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간이 포기하지 못하는 가장 큰 욕망은 무엇일까. 돈일까, 명예일까. 법정 스님께서는 돌아가시면서 당신이 쓴 책을 더 이상 출판하지 말라고 했다. 생전에 누렸던 그 많던 명성의 허무함을 생의 마지막에 깨달으신 것일까.
위대한 천재 미켈란젤로는 거의 성인에 가까운 삶을 살았다. 90년이라는 긴 세월을 사는 동안 모두 7명의 교황이 바뀌었고, 교황들이 한결같이 그가 만든 작품을 원했다. 수요가 공급보다 많았으니 그는 작품 주문자인 교황, 왕, 추기경 등 당대 최고 권력자들과 맞먹는 상황까지도 갔다.
미켈란젤로는 성질은 괴팍스러웠으나, 하늘이 두쪽이 나도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었을 뿐 비이성적이지는 않았다. 옷차림은 늘 검소했고, 남몰래 어려운 이들을 도왔으며, 가족 전체를 먹여 살리느라 등골이 휠 정도로 일했다. 정도 많고, 유머도 많았으며, 평생 그를 도운 조수에게는 다정한 주인이었다. 이런 그가 포기하지 못한 것이 있으니 바로 명예였다.
“비범한 화가이자 조각가인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는 레조 지방의 유서 깊고 빛나는 황제의 피를 이어받은 카노사 백작 가문 출신이다.”
미켈란젤로 생전에 쓰인 전기의 시작 부분이다. 미켈란젤로는 제자 콘디비를 시켜서 이 전기를 쓰게 했다. 전기의 처음 몇 페이지는 장황하게 가문의 선조 카노사 백작의 혈통에 대한 설명이 이어지지만 미켈란젤로의 부오나로티 가문이 카노사 백작의 후손이라는 증거는 사실상 없다고 한다. 미켈란젤로는 조카에게 꾸지람을 할 때면 “우리는 고귀한 것으로는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집안”이라고 했다. 미켈란젤로는 왜 그토록 가문의 명성에 집착했을까.
나는 그 이유를 당시 미술가의 사회적 지위에서 찾고자 한다. 미켈란젤로의 긴 생애 동안 미술가의 지위는 노동자였던 장인(匠人) 계급에서 사회 엘리트층인 귀족 계급으로 상승했다. 예술가의 이 같은 신분 상승은 미켈란젤로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는 “예술은 귀족이 하는 일이지 서민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라고 했다.
나는 재작년 「인생교과서 미켈란젤로」라는 책을 출판했는데 출판 당시에는 그의 고향과 태어난 집을 가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의 가문이 어느 정도의 수준인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작년 여름 성 프란치스코가 오상을 받은 라 베르나 산 순례를 마치고 내려오면서 해발 1200m에 자리 잡은 미켈란젤로 부친의 근무처를 우연히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거기서 한참을 더 내려와 해발 700m의 산골 마을인 미켈란젤로의 고향 카프레세(Caprese)를 방문할 수 있었다. 미켈란젤로가 그토록 자부심을 가졌던 가문의 실상을 파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뭐 결론부터 말하자면 일단 그는 엄청난 산골 출신이었다. 그가 태어난 주택은 큼지막한 석조 건물로 당시 그의 부친은 그 집에서 지방관청장(Podesta) 업무를 봤던 관사였다. 소년 미켈란젤로는 산골의 작은 마을 출신이지만 그 동네에서는 행세 꽤나 했던 집안의 자제였음에는 틀림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가 평생 상대했던 메디치 가문 사람들을 비롯해 교황, 추기경 등에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이 같은 한계는 그가 제자에게 구술까지 해주면서 자신이 귀족 가문임을 강조한 이유가 아니었을까. 그리고 한가지 드는 생각은 당시 미켈란젤로가 그토록 중시했던 귀족 출신이라는 것이 오늘날 우리나라에서는 학벌로 바뀐 것이 아닐까.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출처: 가톨릭평화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