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언제부터인가 야생화를 좋아하게 되었다. 다양한 색깔과 모습으로, 화려하지는 않지만 나름대로 독특함을 갖고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얼마나 신비로운지 모른다. 예전에도 내 주변에 많이 존재해 있었겠지만 그때는 그냥 스쳐 지나가는 하찮은 들꽃이었을 뿐이었다.
작년에 대관령 목장길을 걷다가 수많은 늦가을 들꽃들을 줄지어 만난 적이 있다. 이름을 아는 꽃을 만날 때는 그 이름을 부르며 반가워했고, 이름을 모를 때는 스마트폰을 대고 사진을 찍어 그 이름을 알아보려 했다. 투구꽃, 아기똥풀, 물봉선…. 이렇게 아는 이름들을 찾아 하나하나 불러주다 보면, 그 꽃들이 어느새 내게 예쁘고 친밀한 존재로 친근하게 다가온다.
사회에서 성당을 다니는 사람을 만나면 제일 먼저 물어보는 것이 세례명이다. 세례명을 일단 알고 나면 그 주보 성인을 떠올리게 되고 그들의 성격이나 삶을 그 성인의 삶에 비추어 짐작해 보기도 한다. 꽃과 마찬가지로 사람도 그 이름을 알고 기억하게 되면 그들이 내게 더 소중하게 다가온다.
성경에서는 이름이 바로 그 사람의 소명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하느님께서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부르시며 번성하여 하느님 백성을 이루라 하셨고, 예수님께서 시몬을 교회의 반석이 되라고 베드로라고 부르신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자신의 이름이 불릴 때 자신의 정체성을 인식하게 되고, 소명을 새롭게 깨닫게 되고, 이름을 부른 분의 현존을 인식하게도 된다.
주님께서 ‘사무엘아’ 하고 세 번이나 이름을 부르신 끝에 어린 사무엘이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하는 장면(1사무 3,10)이 있다. 사무엘의 이름을 부르신 주님께서는 스승 엘리에 대한 예언을 전하라는 사명을 주신다.
주님께서 만일 지금 내 이름을 부르신다면 나는 어떤 대답을 하게 될까 잠시 생각해본 적이 있다. ‘누구신데요? 저는 지금 바쁩니다. 나중에 부르세요’ 하며 귀찮아할지 모르겠다. 아니, 스마트폰에 빠져서 부르시는 음성도 못 듣고 그냥 지나칠지도 모른다. 각종 교통, 통신 수단이 발달한 덕분에 오히려 주님의 부르심에 귀 기울일 시간도 없이 시간에 더 쫓기는 삶을 살게 된 것이 현대 사회의 아이러니다.
고등학교 시절 명동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는데, 내 세례명은 후고다. 내 생일과 비슷한 시기에 축일이 있는 성인으로 수녀님이 골라 주셨는데 프랑스 그레노블의 주교였다. 신심이 돈독했던 후고 성인의 어머니는 성인이 출생하기 전 베드로 사도가 후고 성인을 안고 하느님께 봉헌하는 계시를 받았다.
어려서부터 신학 공부를 열심히 했고, 교리와 교회법에 정통해서 주교님을 많이 도와주었는데, 주교님과 함께 아비뇽 시노드에 참석했다가 성직자보다 더 성직자 같은 생활을 하는 평신도인 후고에게 교황님께서 직접 주교품을 주셨다. 그후 그레노블 주교로서 교회 개혁에 앞장서고 교구 조직을 재정비하였다.
올해 우리는 평신도 희년을 맞이하고 있다. 이번 기회에 각자 주보 성인의 삶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보면 어떨까? 하느님으로부터 어떤 부르심을 받고 있는가를 살펴보면 좋을 것 같다.
금욕과 청빈과 기도의 삶을 살아왔던 평신도 출신 주교 후고 성인의 이름을 지니고 있는 나는 성인과 같은 삶을 살려고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 새삼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주보 성인을 모시고 있는 우리 평신도들이 각자의 소명을 새롭게 되새기며 기쁘게 살아가는 희년이 되기를 기도해 본다.
출처: 가톨릭평화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