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단상] 249. 자연이 주는 기쁨

서정홍 (안젤로, 농부시인)
서정홍 (안젤로, 농부시인)

 

우리 집 장롱 나이는 서른 살입니다. 사연이 참 많은 장롱이지요. 어느 젊은 예비부부가 혼인 날짜 잡고 함께 살 방까지 얻어 놓고는 집안 문제로 파혼을 했대나 어쨌대나요. 예비부부가 살 방에 미리 사 둔 새 장롱이 있었는데, 그 장롱을 반값에 판다는 거예요. 이때다 싶어 아내랑 그 ‘파혼한 장롱’을 사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그 소문을 들은 이웃들이 마치 자기 일처럼 반대했습니다. 왜 하필이면 중고 장롱을 사느냐는 둥, 몇 푼 더 주고 새 장롱을 사라는 둥, 파혼한 장롱은 재수가 없다는 둥…. 단칸방 가난한 살림살이의 아내와 나에게 그런 말이 귀에 들어올 리가 없지요. 숱한 반대를 무릅쓰고 파혼한 장롱을 산 지 어느덧 서른 해가 지났습니다. 그동안 우리 식구들 아무 탈 없이 잘 살았습니다. 사는 게 뭐 별건가요. 밥 잘 먹고, 똥 잘 누고, 정직하게 살면 되지요.

오늘 낮 아내와 나는 파혼한 장롱 앞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았습니다. “파혼한 그 젊은이들 말이에요. 집안 문제 같은 거 따지지 않고, 어질고 수더분한 사람 만나 잘 살고 있으면 좋겠어요.” “파혼한 장롱으로 우리가 잘 살고 있으니, 그들도 잘 살고 있지 않을까요?”

“파혼한 장롱은 재수가 없다는 말은 아무리 생각해도 거짓말 같아요.” “그건 말이 아니고 개똥이지요.” “개똥이라니요?” “그만큼 쓸모없다는 말이지요.” “아니, 당신은 ‘개똥밭에서 인물 난다’는 말을 못 들었나 보네요.” “당신도 이젠 산골 사람 다 되었소그려.”

그렇습니다. 아내와 나는 산골 사람이 다 됐습니다. 도시에서 살 때처럼 달마다 받는 ‘월급’이란 게 없어 검소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집안 곳곳에 중고가 참 많습니다. 옷도 신발도 짐차도 전자제품도 거의 중고입니다. 아내와 나는 “우리 이러다가 중고 인생 되겠다”며 한바탕 웃기도 합니다.

시멘트와 아스팔트로 뒤덮인 도시에서 살다가 하느님이 만드신 숲이 있는 산골에 살고부터 잃은 게 있다면 돈이 주는 편리함 말고는 떠오르는 게 없습니다.

그러나 산골에서 얻은 것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열일곱 평 작은 흙집에서 자고 일어나면 알람시계처럼 새벽마다 찾아와 노래를 부르는 멧새들, 언제 들어도 은은한 풀벌레 소리, 에어컨 바람보다 더 시원하고 고마운 산바람, 가까운 숲에서 뿜어내는 맑은 공기, 한 해 내내 마르지도 않고 흐르는 개울물, 가까운 텃밭에서 자라는 건강하고 싱싱한 푸성귀들,

산과 들에 나가면 그냥 얻을 수 있는 산나물과 들나물, 자동차를 타고 꽃구경 다니지 않아도 철마다 때가 되면 제멋대로 곱게 피는 들꽃, 장독대 둘레에 저절로 피는 봉선화와 채송화와 분꽃, 산길에서 자라는 새콤달콤한 산딸기, 밤이면 수없이 빛나는 별, 그 무엇보다 아이들처럼 토라졌다가 금세 웃고 지내는 산골 할머니들…. 이 모두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자연이 그냥 주는 선물이고 기쁨입니다.

아내와 나는 오늘도 어제처럼 새벽 5시부터 9시까지 수수밭과 녹두밭에 풀을 매고 돌아왔습니다. 찜통더위에 땀범벅이 되어 돌아와 몸을 씻고 시원한 물을 마시던 아내가 어린아이처럼 웃으며 말합니다. “물이 제일 맛있네요.” 이 또한 자연이 그냥 주는 선물이고 기쁨입니다.

 

출처: 가톨릭평화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