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단상] 307. 간절함

(신달자, 엘리사벳, 시인)
(신달자, 엘리사벳, 시인)

 

재가 되는 순간까지 같이 가는 동반자가 있습니까? 저는 있습니다. 바로 늘 제 옆을 지키는 나무 묵주와 실매듭 묵주입니다. 아주 오래 함께 살아와서 조금은 닳아있는 이 묵주 두 개는 제 살붙이나 같습니다. 여러 사람에게 구슬과 유리, 옥으로 만든 예쁘고 화려한 묵주를 선물 받았지만, 전 저와 함께 영원히 재가 될 수 있는 이 두 개의 묵주로 늘 기도합니다. 영원한 친구이며 동반자입니다.

며칠 전 어느 지인이 “나는 내 마음을 따라 산다”고 했습니다. 저는 절대로 그렇게 살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제 마음은 때때로 공정한 도덕을 벗어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마음을 따를 수 없는 갈등에서 저를 지켜 주는 힘이 바로 묵주입니다. 마음을 따르려고 하는 본심의 갈등 속에서 시가 태어나기도 하지만, 끝까지 저를 바르게 살게 하고 지켜 주는 것은 묵주입니다.

전 공정한 관찰자를 가슴에 지닌 이성적 인간이 못됩니다. 바람의 사촌쯤으로 태어났는지 너무 자주 흔들립니다. 저를 믿지 못하고 괴로워할 때가 많습니다. 성당에서 여러 차례 강의하고, 시집을 열 권 이상 세상에 내어놓고, 많은 사람 앞에서 강의하지만 위선이 왜 없겠습니까.

비신자보다 요상하게 자기 진심을 가리며 분별력의 웃음으로 위선을 날리지만, 제 기도가 길어지는 일, 제 침묵이 길어지는 일은 늘 반성 안에서 ‘내 탓이요’를 잘게 잘게 씹는 시간일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 아래 성모님이 새겨진 묵주를 들고 앉으면 ‘이미 다 아는 사이’라는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 없는 거리의 버팀목이라 마음속이 꽉 차고 하염없이 행복합니다.

그런 동반자이기에 저는 두려움이 없을까요? 드린 말씀대로 ‘거리 없는 거리의 동반자’가 제 안에 있는데도 본능적인 공포는 멈추지 않습니다. 혼자 있는 시간이 많은 저는 새벽 두 시쯤 캄캄한 창을 내려다보며 허공을 딛고 선 두려움이 솟구칩니다. 묵주 두 개로는 부족한 듯 이 세상 묵주를 모두 어깨에 메고 절룩이며 남산에라도 올라야 할까요.

아무리 온몸에 묵주를 메도 예수님의 십자가 한 조각도 따르지 못하면서 묵주 찬양을 입으로만 하는 게 아닌지 다시 부끄러워집니다. 특히 스스로 삶의 여정이 순탄치 못하다고 ‘왜 저에게?’라고 억지를 부려 보기도 하지만 누군들 가슴에 폭탄이 없겠습니까. 고요히 소리 없는 폭탄을 성심으로 누르느라 홀로 묵주를 돌리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입니다.

생각하면 참 많은 행운을 선물 받았습니다. 이것만은 잊어서는 안 된다고 가슴에 성호를 긋습니다. 어둠도 공포도 주님이 다 아시는 삶의 한 조각이라 생각하고 친해지려고 합니다. 더 낮아지려 합니다. 부족한 저는 단 한마디 ‘간절함’으로 살려 합니다.

‘간절함’이 제 자산의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진정한 평화의 성수 한 모금이라도 오늘 다시 제 마른 입술을 축이려고 이른 새벽 성당 갈 채비를 합니다.

출처: 가톨릭평화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