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단상] 6. 열매는 왜 귀한가?

신달자 엘리사벳 (시인, 한국시인협회장)
신달자 엘리사벳 (시인, 한국시인협회장)

“인내는 쓰고 열매는 달다”라는 이 닳고 닳은 격언이 빛나는 때가 왔다. 살아 있다는 사실에 모두 감사할 만큼 지난 여름은 우리의 인내를 시험했다. 도저히 견디지 못한다고 에어컨에 선풍기에 부채를 총동원하면서 얼음물을 마시던 사람들이 한시름 놓는 듯 지난 더위를 기억조차 하기 싫어한다.

그러나 우리는 잘 견디었고 살아냈다. 몇 사람만 모이면 우리나라 기후가 점점 열대지방이 된다느니, 10년 20년 후에는 50도가 넘을 거라느니 하는 정보들이 나돈다. 그건 또 그때 이야기다.

물론 전기 소비를 줄이는 방법이나 대책이 필요하겠지만 중요한 것은 지난 더위 속에서 반드시 나쁜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준비 기간이 좀 힘들게 왔던 것이다.

준비 기간이 있어야 열매는 존재한다. 단시간에 되는 일은 하나도 없다. 성장하는 일에서, 친구를 사귀는 일에서, 꿈을 갖는 일에서, 연애하고 결혼을 하는 일에서, 자식을 낳고 키우는 일에서, 모든 사는 일에서 단번에 되는 일은 단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다. 남들은 쉽게 사는 것 같고 나만 어려움을 견딘다고 생각했었다.

어디 쉬운 삶이 있으랴, 모든 사람들은 모두 혹독한 준비 기간을 가지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오늘 이 순간이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바구니에 잘 익은 과일을 수북이 따 담기 위해서는 여름이라는 땡볕의 숨찬 더위를 지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을 맞는다. 이 순간의 열매, 살아 있는 이 순간의 고귀한 열매를 너무나 소홀하게 생각하는 경우가 잦았다.

생각해 보면 나는 여름에 특히 많은 글을 써 왔다. 창작 의욕이 겨울보다 훨씬 더 강하게 작용했다. 아마도 무엇을 이겨야 한다는 도전의식과 다르지 않았으리라.

물론 이번 더위는 전혀 달랐지만 “이것을 이기지 않으면 다음 페이지는 영영 오지 않는다”라는 내 나름의 교훈이 자리 잡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허영이 많고 일에 대한 욕심도 남달라서 고통이 내게 왔을 때 “왜 왔냐”고 따지지 않고 “너하고 어떻게 사귀는 것이 좋으냐”고 묻는다.

왜? 그 다음 페이지에 도달하기 위하여…. 아버지는 편지에서 지금을 견디지 못하면 다음 페이지에 있는 너의 행운을 만나지 못한다고 하셨다. 여고 시절 외지에서 하숙하고 있을 때 아버지는 자주 편지를 주셨다.

편지마다 이 말을 쓰지 않은 편지는 없었다. 그때만 해도 너무 내성적인 나를 아버지가 걱정하시며 타지 생활을 잘 견디라는 뜻으로 자주 편지를 보내셨다. 다음에 만날 나의 행운을 놓치기 싫어 오늘 이 순간의 지겨움과 귀찮은 것들을 참고 견디었다.

나도 내 딸을 외국에 보내고 그 구절을 한 백 번 편지로 써 보냈다. 딸에게서 이제 그만하라는 답장이 몇 번 왔지만 나는 계속 썼다. 내가 아니라 내 딸이 다음 페이지에 만날 행운을 놓칠까봐 내가 더 손에 힘을 주곤 했던 것이다.

어려운 일이 닥치면 늘 나는 두 팔에 힘을 준다. 아버지가 옆에 계신 것처럼 이 어려운 고통을 이겨내려고 안간힘을 쓴다. 왜? 그 다음 페이지에 있는 나의 행운을 만나려고 말이다.

그러나 지금은 다음 페이지를 생각하지 않는다. 다음 페이지에 만나는 행운을 누가 가져도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참 좋으신 나의 아버지가 그 행운을 내가 가져야만 하는 행운이 아니라 누가 가져도 좋을 행운을 반드시 필요한, 그리고 준비기간을 잘 보낸 사람에게 주시라고.

출처: 가톨릭평화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