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단상] 16. 주님, 우리 곁에 계시는 주님

한수산 요한 크리소스토모 (소설가)
한수산 요한 크리소스토모 (소설가)

 <가톨릭 3수생- 7ㆍ끝>

   부활절 후의 첫 주일미사였다. 강론을 시작하면서 신부님이 물으셨다.

 ”여러분, 부활하신 예수님이 하신 첫마디가 뭔지 아십니까?”

 아무도 대답이 없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하신 첫 말씀이 무엇이었는지 아는 사람이 누구야, 누구? 다들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물으신 첫마디는, 내 팬티 어디 갔어? 하는 것이었습니다.”

 갑작스런 신부님의 말에 다들 웃어도 될지 어째야 할지 몰라 표정들이 일그러지는데 다음 말이 이어졌다.

 ”두 번째 하신 말씀이, 막달라 마리아 시집갔니? 하는 것이었고 그다음에 물으신 게, 유다 요놈 어디 있냐? 하는 것이었답니다.”

 그제야 교우들이 와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부활절을 지나면서도 감동이 없이 덤덤하기만 한 신자들 때문이었을까. 애써 마련한 신부님의 개그였다.

 그렇게 주일을 맞고, 십여 개의 묵주를 가지고 이것저것 골라가면서 성모송도 바치고, 겨우겨우 믿음을 지탱하면서 이 가톨릭 3수 열등생은 살아간다.

 주변의 교우들이 냉담 속으로 빠져드는 것을 보자면 대게 그 이유가 두 가지이다.

 ’그 인간 보기 싫어서’ 성당에 안 나가는 게 그 가운데 하나다. 교우들 가운데 누군가 그 사람 하는 꼴이 보기 싫어서 하느님조차도 멀리하게 되는 어리석음이다.

그리고 또 하나가 ‘내가 그렇게 했는데도… 주님은 아무 응답이 없다’는 것이다. 당신 곁에서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모른 채 그걸 참지 못하는 또 다른 어리석음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손톱을 물어뜯는 버릇이 있었다. 어른이 되어서도, 결혼을 해서도, 나이 마흔을 넘기고도 그 버릇을 고치지 못했다. 세례를 받고 얼마 후였다.

손톱을 물어뜯고 있다가 이런 기도 아닌 기도를 드렸다. ‘주님, 저 이 버릇 좀 고치게 해 주세요. 이 몸이 바로 주님이 주신 건데, 주님이 주신 걸 제가 매일 물어뜯고 있잖아요.’

 그 다음 날부터 손톱을 물어뜯는 버릇이 씻은 듯 사라져 버렸다. 신비했다. 어쩌면 단칼에 이렇게 고쳐 주실 수가 있단 말인가 감격할 수밖에 없었다. 하느님이 나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몸으로 느낀 순간이었다.

 주님이 손톱 물어뜯는 걸 고쳐주셨다면 웃는 분들이 계시리라. 몹쓸 병을 고쳐 주셨거나, 아이를 대학에 덜컥 들어가게 해 주셨다면 또 모를까, 주님이 뭐 할 일이 없어서 겨우 그까짓 손톱 물어뜯는 버릇을 고쳐주겠냐고.

그러나 주님이 내 곁에 계신다는 것을 어떻게 이보다 더 선명하게 새겨 넣겠는가. 그래서 교우들을 만나면 말하곤 한다. 첫 영성체의 그날을 잊지 맙시다, 그 감격을 생각합시다. 감격의 눈물로 받아 모시던 첫 영성체, 그날을 생각할 때 무엇이 힘들고 두려운가요.

 우리에게 순교는 무엇인가. 오늘 우리들의 신앙 속에서 순교는 어떠해야 하는가. 아주 단순하다. 달라야 한다, 다르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오늘 우리들의 순교다.

택시기사 김씨는 천주교 신자이기에 운전을 하는 것도 다르다. 김 선생님은 천주교 신자라 역시 학생들 대하는 게 다르군. 은혜 엄마는 천주교 신자라 그런지 뭔가 달라도 달라요. 그러면 되는 것이다.

 주님을 따라 걷기에 그렇게 다른 것, 그것이 오늘 우리들 하루하루에서 찾아나가는 순교의 첫걸음이 아니겠는가.

출처: 가톨릭평화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