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단상] 36. 차 한 잔의 대접

이효재 지나(한복 디자이너ㆍ보자기 아티스트)
이효재 지나(한복 디자이너ㆍ보자기 아티스트)

 

옷 잘 입는 여인과 가끔 서울 성북구 북악 스카이웨이 끝자락에 있는 커피집에 들렀다가 성벽 아래 벤치에서 커피를 마시기도 하고, 동네 국숫집에서 간단한 식사를 하기도 했다. 그렇게 소소한 일상을 나누는 사이가 됐다.

그 여인은 잃어버린 나의 신심을 찾게 하려고 어느 날 내게 성지순례를 가자고 했다. 서울 근교에 있는 성지로 마실을 가듯이 나들이를 갔다.

주위는 잔잔한 평화로 가득 차 있어서 현실 같지 않게 아름다웠다. 순례를 온 분들이 두셋씩 꽃 무더기처럼 모여 수런수런 꽃말처럼 기도하는 모습이 멀리서 아름답게 보였다. 한쪽에선 기도 끝에 한숨을 쉬는 일행들도 있었다.

순례객들 앞을 지나는데 한 여인이 “가톨릭 신자이시냐?”며 반색을 했다. 가져온 보온병 뚜껑에 커피를 따르던 여인은 뚜껑에 담긴 마지막 한 잔의 커피를 내밀었다. 그때 딱 흥부네 집 아이처럼 식후 커피 한잔이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같이 순례 온 일행에게 커피를 다 나눠주고 남은 마지막 한 잔의 커피를 내미는 그 여인의 손에서 나는 신의 마음을 느꼈다. 나는 내 집에 오는 셀 수 없는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차를 냈을까? 그날이 그날인 일상에서 우물처럼 퍼 올렸던 차 한 잔의 대접이 귀하게 여겨졌다. 스산한 날씨의 성지에서 남모르는 여인이 불쑥 내민 차 한 잔이 마음을 따뜻하게 적셨다.

텔레비전을 보고, 내 책을 보고 찾아오는 많은 이들, 길상사 앞에 순례를 왔다가 여행을 왔다가 그냥 지나치다가 그 앞에서 언뜻 발견한 ‘효재'(한복숍)라는 간판을 보고 반가움에 들리는 많은 사람에게 대접했던 차 한잔들이 모이고 모여서 내게로 왔구나. 시냇물이 강물이 되고 바닷물이 되고 그 바닷물이 증발해서 구름이 되었다가 어느 날 비가 되고….

이렇게 우주 기운이 순환되듯이 그래 내 차 한 잔의 대접이 우주 한쪽에 보태어져 있다가 가문 날 소낙비처럼 이른 아침의 한 방울 이슬처럼 내게로 왔구나.

성지에서 귀한 커피를 대접받은 나는 지금도 수많은 사람에게 우물의 물을 퍼 나르는 아낙네처럼 우물물을 길어서 때로는 뽕잎 차를 끓이기도 하고, 그것도 바닥이 나면 일회용 커피를 내기도 하고, 더운 날에는 얼음물 한 잔에 부추 꽃 한 송이를 띄워 목을 축여주고 있다.

 

이끼

그대는
바위보다 더 큰
산이고

나는
그 산 어디
아담한 바위 하나
덧옷
입히는
이끼로
남겠습니다

 

출처: 가톨릭평화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