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개가 자욱하다.
“할 말이 많은 자는 오랜 침묵에 잠겨야 하고, 번갯불을 당기려는 자는 많은 구름을 모아야 한다.” 마음을 당기는 이 글이 녹록지 않은 삶에 많은 생각을 하던 시기였다. 15년 전, 안개를 걷어내고 싶은 간절한 마음에 파리에서 고등학교에 다니는 딸아이의 봄방학을 이용해 루르드로 향했다.
그곳에 상주하시는 수녀님을 위해 김치를 담그고 여행을 위한 김밥도 준비하고 테제베를 탄다. 프랑스의 전원풍경을 바라보며 김밥을 먹는다. 아이는 급하게 김밥을 먹다가 체하고 말았다. 얼굴이 샛노래지더니 식은땀까지 흘린다. 쩔쩔매는 우리를 보던 프랑스 여인이 다가와 묻는다.
체한 것 같다고 하니 자기가 기도해도 되겠느냐고 한다. 아이의 가슴과 등에 두 손을 얹고 눈을 감은 채 깊은 기도에 든다. 뱀 모양 반지를 끼고 있는 걸로 보아 봉사자 같은 느낌이 왔다. 힘들어하던 아이가 편안한 얼굴이 된다. 성모님 성지에 도착도 하기 전부터 따뜻한 손길이 임하고 있다. 드디어 루르드다.
아담한 역사를 지나 한국인이 경영하는 호텔에 든다. 입구에서부터 은은한 장미 향이 풍긴다. 주인에게 장미 향수를 좋아하느냐고 물었다. “아! 그 냄새를 맡으셨군요.” 하며 향기의 내력을 이야기한다.
프랑스의 유명한 한 봉사자의 이마에는 강한 십자가가 새겨져 있는데, 그분이 안수기도를 하면 기적이 일어나고 그래서 신자들이 늘 따른다.
어느 날 이 호텔에 그녀가 묵고 간 방에 묵주를 걸어둔 못에서 장미 향이 계속해서 풍긴다고 한다. 방 가까이 갈수록 향이 짙게 나온다. 그러나 이 냄새는 사람에 따라 맡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성모님께서는 가난한 열네 살 소녀 베르나데트에게 열여덟 차례나 발현하셨다. 샘을 가리키며 그 물을 마시고 몸을 씻게 하셨다. 수없이 많은 치유의 기적이 일어난 루르드는 일 년 내내 세계 곳곳에서 몰려오는 순례객으로 넘친다. 수녀님 안내로 박물관과 성당 곳곳을 구경했다.
정성과 신심으로 점철된 아름다운 성당도 감동이었지만 배 모양의 지하성당은 프랑스인들의 예술적 심미안을 보여준다. 시멘트로 만든 배 형상의 현대적 건축물에 수십 겹의 유리로 만들어진 14처는 보석처럼 빛난다.
한가운데 제대를 향해 시선이 모이게 하여 뜨거운 성령의 불길로 표현한 제단은 훌륭한 아이디어다. 절제된 무채색의 시멘트에 포인트만 살린 이 건축물은 퍽 인상적이었다.
그날 밤 자정, 우리는 성모님 앞에 앉았다. 얼마나 애절한 손길이 이곳을 어루만지며 기도했길래 동굴이 닳아 둥글어졌을까? 아직도 샘물은 끊이지 않고 솟아오르고 성모님의 사랑은 흘러내린다.
풀리지 않는 숙제 보따리를 펼쳐놓고 어둠마저 사랑의 깃에 묻힌 이 공간에서 어린애가 된다. 가져온 보따리가 서울에서는 그토록 컸었는데 성모님의 손길로 눈 녹듯 사라진다. 이 적요의 평화를 어찌 잊을까? 이대로 영원히 머물고 싶다.
다음날 수녀님께서 권유하신 침수를 한다. 분홍색 옷을 입고 있는 작은 성모상에 입을 맞추고 깊숙이 물속으로 몸을 누인다. 봉사자들의 익숙하고 따뜻한 손길에 몸을 맡기는 순간 폭포수 같은 눈물이 몸 전체를 흔들어 감당할 수가 없다.
이 알 수 없는 눈물의 은총이 익숙한 듯 봉사자는 빙긋이 웃으며 바라본다. 몸을 닦는 수건을 왜 주지 않을까 궁금했는데 거짓말같이 옷을 입기도 전에 말라버린다. 쌀쌀했던 2월 날씨에도 불구하고 온몸이 날아갈 듯 발걸음이 가볍다. 안개에 덮여 있던 마음속 갈등이 걷히고 성모님 은총으로 휘감긴 마음은 사랑으로 다시 태어났다.
안타까움과 슬픔과 분노로 나라가 어느 때보다 기도가 절실히 필요한 때이다. 죄 없는 아이들이 희생양으로 바쳐질 수밖에 없는 이 시대의 위기를 직시하며 루르드에 발현하신 성모님의 사랑이 어느 때보다 간절하기에 그때의 감동을 다시금 되새긴다.
출처: 가톨릭평화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