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곳은 모든 것이 깊었다.
「그리스 수도원 화첩 기행」을 발간한 지도 4년이 흘렀다. 그동안 집 안팎으로 많은 일에 파묻혀 시간은 화살처럼 바삐 지나갔다. 기억 저편으로 사라져 가려는 이 책이 다시 세상으로 고개를 내민다. 사도 바오로를 따라간 여행길에 보너스로 주어진 일이었다. 일반인이 근접할 수 없는 크레타섬 흐리소피기 봉쇄 수도원에서의 체험을 그림과 함께 풀어놓은 책이다.
이 모든 일에 중심이 되어주신 그리스정교회 트람바스 소티리오스 대주교님을 이 순간에 꼭 만나뵈러 가야만 할 것 같아 가평 수도원으로 간다. 오랜만에 들어선 수도원은 예전보다 더 성스러운 기운이 세속을 밀어내고 있다.
한 뼘 차이의 공간에서 다른 차원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놀라운 힘은 무엇일까? 신비한 이 공간이 새롭게 다가와 빙 둘러 싸여있는 산을 혼자서 바라본다.
언제 나오셨는지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아가티 수녀님께서 항시 기다리고 계신 고향의 어머니처럼 반겨주신다. 언제나, 항상, 그곳에서, 같은 모습으로 기다려주는, 아! 성모님과 같은 푸근함이 아닌가!
85세 대주교님의 모습에서도 흘러간 시간을 감지할 수가 없다. 더 활력이 넘치고 인자하신 모습에 감탄한다. 새로운 교리서를 편집하시느라 열심이셨다. 먼저 성당에 들어가 조용히 기도하게 하셨다.
그리스정교회 특유의 성화가 가득 그려진 성당에는 밀랍초 향이 가득 배어 있다. 성당에 모셔져 있는 2000년 전 성인의 뼛조각에 친구를 한다. 메테오라의 두 평 성당에서 만난 예수상과 비슷한 예수상이 모셔져 있는 것을 처음 발견했다. 눈을 감고 감동이 물결쳤던 그 순례길로 마음은 어느새 떠났다.
태곳적 풍경 속 동굴성당에서 테오 수녀님과 함께 성전의 기름 등잔에 불을 밝히던 순간으로 시간을 거슬러 훌쩍 날아간다. 우리도 아득한 시간에 머물러 있는 듯 세상의 시간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
동굴 속을 가득 채우던 테오 수녀님의 청량한 목소리는 벽을 타고 퍼져간다. 그 동굴 성당에 머무셨던 은수자는 벌꿀과 약초를 먹고 지낸 성인처럼 자연이 주는 가장 단순한 음식으로 지내셨다.
거대한 산의 준령을 따라, 오랜 세월의 비밀을 간직한 나무들만이 바람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고 있다는 듯 반짝이는 신묘한 공간이다. 이 놀라운 고요함 속에 깃든 영적인 고귀함은 은수자의 영혼이 펼쳐놓은 사랑의 그물일까?
이토록 혼탁하고 바쁘게만 돌아가는 세상을 잠재워주는 평화로운 영혼들이 깊은 곳곳에서 존재하고 있기에 지구는 돌아가고 있나 보다.
가평수도원의 고요가 크레타 동굴 수도원의 평화 속으로 전이되었다. 수녀님의 노크에 정신이 든다. 대주교님 그리고 수녀님과 함께 가난하고 풍요로운 저녁 식사를 한다.
대주교님 위치에서는 상상할 수 없으리만큼 조촐한 식탁에 늘 감동하곤 했다. 육신은 검소하고 청빈하나 정신은 한없이 높은 곳에 머무시고 인자하기 그지없으나 강건하신 절제로 말없이 온몸으로 본보기를 보여주신다.
지난 여행의 즐거웠던 추억과 젊은 날 바다를 좋아하셔서 선장이 되고 싶었던 꿈과 평화신문에 연재했던 바오로 사도와의 추억과 새롭게 시작하는 일들의 이야기로 꽃을 피운다.
여전히 1인 4역의 일속에서 바쁘게 지내는 나의 눈동자를 조용히 바라보신다. 오늘의 일은 오늘 하루로 충분하며 아무리 많은 일이 산적해 있더라도 주님께 모든 걸 맡기라고 따뜻한 눈빛으로 말씀해 주신다.
이 넓은 수도원의 공기가 단지 두 분의 기도와 사랑으로 성스러운 공기로 가득함에 새삼 놀랐다. 어느덧 밤은 깊어가고 여행에서 돌아오실 즈음에 다시 만나기를 기약한다. 수녀님께서는 친정엄마인 양 봉지 가득한 꾸러미를 차에 넣어 주신다.
여행 중 별났던 룸메이트 기호를 꿰뚫고 계셨기에 웃음이 새어나오는 봉지들이다. 사랑이 가득한 그곳을 떠나며 모든 것이 깊을 수 있는 것은 더 단순한 삶과 주위를 잠재우는 고요함과 내적인 평화를 샘솟게 하는 기도의 힘이 원천이 아닐까! 큰 분을 가까이에서 모셨던 은총의 시간이 깊은 밤 대기를 타고 더 높은 분의 자비 속에 머문다.
출처: 가톨릭평화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