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민 신부) 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묵상

이제민 신부 지은 “예수는 정말 부활 했을까”에서 옮김

 

사도신경에서 우리는 ‘육신의 부활을 믿나이다’라고 고백한다. 우리가 장차 부활하리라는 것을 믿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자기도 예수처럼 부활하리라고 믿는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비추어 우리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묵상해 보자. 당신은 부활한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 본 적이 있는가? 아직 살아 있는 사람으로서 자신의 부활한 모습을 그려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사람으로서 자기 안에서 죽고, 자기 안에서 부활한 자신의 모습을 상상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내가 부활한 후의 모습은 몇 살 때의 모습일까?

예컨대 당신이 지금 서른 살이라고 가정해 보자. 그리고 앞으로 50년을 더 살아 여든 살에 죽는다고 해보자.

부활한 당신은 몇 살 때의 모습을 하고 있을까? 여든 살 노인의 모습을 하고 있을까? 아니면 지금의 모습을 하고 있을까? 아니면 지금의 모습으로 부활할까? 만일 그렇다면 서른에서 여든 살까지 인생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예수의 부활이 답변을 준다.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당신보다 2000년 후의 삶을 살고 있는 나를 알고 계실까? 지금 사제가 되어 컴퓨터 앞에서 당신의 부활에 대해 글을 쓰고 있는 나를, 당신께 기도하고 있는 나를 알고 계실까? 한국교회와 그 문제점을 알고 계실까?

2000년 후의 사람들이 어떤 상황에서 어떤 문제를 안고 살고 있는지 내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것처럼 그분도 나의 삶이 이런 환경에서 펼쳐지리라는 것은 물론, 세상이 이처럼 발전하리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하셨을 것이다.

그 분이 오늘 우리 앞에 나타나신다면 그분은 분명 컴맹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마치 그분이 우리의 모든 사정을 아시는 것처럼 도움을 청하는 기도를 바친다. 우리의 기도는 헛된 것일까?

우리의 기도가 헛된 것이라면 지금 우리가 2000년 후의 우리 후손들이 쾌적한 환경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며 인간답게 살기를 기원하며 바치는 기도는 헛된 것이 될 것이다.

 

미래의 그들이 잘 되기를 바라는 우리의 보잘것없는 기도와 우리의 희망 때문에 그들은 살아남게 될 것이다. 그들은 지금 기도하는 나를 모르지만 자기들을 위해 기도하고 사랑한 사람들이 있었기에 자기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못할 것이다.

열매는 자기를 위해 땅에 떨어져 썩어 없어진 씨앗을 개인적으로 모르고, 또 그 씨앗이 있었기에, 그리고 씨앗을 땅에 쏟은 열매를 모를 수 있지만 그 씨앗이 있었기에, 그리고 씨앗을 땅에 쏟은 열매가 있었기에 자기 존재가 가능하다는 것을 부정하지 못할 것처럼 말이다. 씨앗은 비록 없어지지만 다시 씨앗을 품은 열매로 영원히 살아 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당신께 기도하는 나를 모를 수 있다. 하지만 인류를 위해 목숨을 내놓으신 그분 없이 나는 존재할 수 없다. 그분 없이는 지금 컴퓨터 앞에 앉아 자판기를 두드리는 나의 존재를 상상할 수 없다.

그 분의 죽음과 삶 안에서 나의 이런 삶이 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모두 후세 사람들에게도 남의 생명을 가능하게 하는 예수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그들의 삶이 어떻게 전개될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의 기도 안에 그들의 삶이 들어 있다면, 우리가 비록 그들을 모른다 할지라도 그들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우리가 예상치 못했던 사고(思考)로 우리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

부활이 이런 사고를, 이런 삶을 가능하게 한다. 부활이 없다면 우리는 희망의 삶을 살 수 없으며, 미래를 위해 기도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은 허무할 뿐이다. 부활의 이런 삶은 우리의 이기적인 꿈을 버리게 한다. 나만의 미래가 아니라 우리의 미래, 인류의 미래를 생각하게 한다.

내 인생의 의미는 이웃(부모·형제·친척 등)과 맺는 관계에서 진하게 체험된다. 그들이 나를 필요로 하고 내 존재를 긍정한다는 사실이 내 인생을 생기 있고 의미 있게 한다. 생물학적 죽음만이 죽음이 아니라 이런 관계가 단절되는 것 또한 죽음이다.

이웃이나 동료에게 더 이상 받아들여지지 않는 관계의 단절을 체험할 때 우리는 절망적 죽음을 체험한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 방어적 자세를 취하며 죽은 뒤에도 자식과 친구와 친척들이 자기를 기억해 주기를 바란다. 그리고 자기가 살아 있을 때 이루어 놓은 업적(후손·사업·사회에 대한 기여등)을 통해 계속 살아 있기를 희망한다.

뿐만 아니라 가족이나 친지들도 언젠가는 죽어서 저승에서 다시 만날 것이라고 위안하며 죽는다. 하지만 시체는 위안을 모른다. 예수께서도 이와 같은 우리의 기억 속에 살아계신 것이 아니다. 씨앗은 열매를 보지 못하지만, 씨앗의 죽음으로 열매가 맺힌다는 우리는 명심해야 할 것이다.

씨앗은 자기 안에 처음부터 열매를 품고 있었지만 정작 자기의 죽음으로 열린 열매는 보지 못한다. 그렇다고 자기가 살아나지 않는다고 서러워하거나 괜히 썩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죽어 없어지는 것을 서러워하는 자는 부활의 삶을 살 수 없을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죽은 자의 장례는 죽은 자에게 맡겨라. 하느님은 죽은 자가 아니라 산 자의 하느님이다. 부활은 산 자를 위한 것이다.

인간은 숨을 들이 쉬고 내쉴 때마다 생명과 죽음 사이를 왔다갔다한다. 숨은 생명의 호흡이다. 숨을 쉰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증거다. 숨이 멈추면 인간은 죽는다. 숨을 멈추는 것으로 인간은 잠시나마 죽음을 체험할 수 있다. 하느님은 인간을 창조하면서 당신의 숨을 주셨다. 생명을 주신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하느님은 인간이 살기를 원하신다.그렇지만 인간은 언젠가 자기가 숨을 거두리라는 것을 안다. 인간은 마지막 숨을 내 쉴 것이고 하느님은 이 숨을 거두어 들이실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인간은 죽는다.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생명은 언젠가 나를 떠날 것이다.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나를 떠날 것이다.

지금 나는 살아 있지만 죽음은 이미 내게 숙명적인 것이다. 나는 나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어떤 사람은 자기 죽음을 자기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며 살 수도 있다. 인간은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있으니까.

그러나 아무리 자기 마음대로 죽음을 맞이한다 해도 궁극에는 자기 자신의 힘으로 맞이할 수 없는 것이 죽음이다. 숨이 넘어가는 그 순간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 자신이 아니다.

자기가 어떻게 죽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고통 중에 앓다가 죽을지, 고통 없이 죽게 될지, 죽음의 순간에 자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한 인간은 아직 자기 죽음을 구체적으로 체험하지 못한 것이다.

이 마지막 체험은 어쩌면 숨이 넘어가는 순간에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이 오면 죽음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거나 이를 남에게 이야기하기 에는 이미 늦다.

그렇지만 지금 살아 있는 동안 우리가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은 확실하다. 죽음은 이미 우리 안에 와 있다. 우리는 이미 죽음에 자신을 맞긴 존재다. 그런데도 우리는 또 죽음에 대해 반항한다. 하느님은 왜 죽음의 세력이 우리를 지배하게 하시는가?

우리는 죽음의 마지막 순간에 무엇을 느끼게 될지 아직 모른다. “아버지,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김니다”(루가 23,46)라고 예수처럼 기도할 수 있을지도 의문스럽다. 어쩌면 하느님을 원망하면서 하느님께 대한 적개심이 생길지도 모른다.

우리는 예수처럼 죽기를 원한다. 그래서 “아버지, 제 영혼을 당신의 손에 맡김니다”라며 죽음을 받아들인 예수께 우리도 당신처럼 죽음을 받아들일 힘들 달라고 청한다. 우리는 “나는 부활이요 셩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 11,25)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을 통해 영원히 하느님 안에서 나고 하느님 안에서 죽으리라는 것을 믿기 확신한다.

그리스도인은 죽음을 의식할 뿐 아니라 또한 부활도 이미 자기 삶 안에서 시작되었음을 확신하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그리스도인은 자기만 살려는 이기심의 껍데기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죽고, 이웃에게 봉사하면서 죽고자 하는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은 이웃을 위해 목숨을 바친 예수처럼 이웃을 사랑하고자 한다. 그분은 말씀하신다.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람은 없다.”(15,13) 그리스도인은 요한 1서의 저자처럼 사랑을 체험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우리의 형제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미 죽음을 벗어나서 생명의 나라에 들어와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사랑하지 앉는 사람은 죽음 속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3,14)

자기 자신이 아니라 남을 위해 사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부활)이 자기의 죽을 운명에 이미 시작되고 있음을 의식할 것이다. 고통 가운데서도 맛보는 자유와 사랑의 기쁨 그리고 행복은 우리가 어려운 삶 가운데서도 부활의 행복을 어느 정도 맛보고 있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암에 걸려 고통을 당하는 어머니를 생각해 보라. 병상에 누워 자기를 찾아온 아들에게 ‘이때처럼 내 인생에서 행복했던 때도 없었다’고 말한다면, 그 행복은 부활한 자가 맛볼 수 있는 것 자체다.

또는 못난 자식 때문에 고통에 찌든 어머니의 얼굴, 평온을 찾아 볼 수 없는 근심스런 얼굴을 생각해 보라. 그 얼굴에서 우리는 자식을 사랑하는 얼굴, 아들에게 생명을 되찾아 주는 사랑의 얼굴을 보지 않는가? 어머니의 그 고통스런 얼굴이 아들에게 참 생명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일상에서 종종 체험하지 않는가.

 

부활은 십자가에 핀 꽂이다. 십자가는 고통과 죽음에 대한 항복으로 비칠 수도 있다. “하느님, 하느님,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라는 예수의 외침을 고통에 겨워 절규한 것으로만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고통스런 절규에서 아버지의 사랑스런 목소리를 듣는 사람은 부활을 체험한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그는 아버지 하느님과 하나가 될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