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림 4주에 우리는 이렇게 입당송을 부른다. “하늘아, 위에서 이슬을 내려라. 구름아, 의로움을 뿌려라. 땅은 열려 구원이 피어나게 하여라”(이사 45,8).
대림 시기에 부르는 가톨릭 성가 94번 “하늘은 이슬비처럼”은 “Rorate coeli desuper et nubes pluant justum”이라고, 이 이사야의 말씀을 라틴어로 부르는 오래된 그레고리오 성가의 선율을 따른 것이다.
성가 92번의 2절의 가사도 이 말씀이다. 이 그레고리오 성가를 조용히 되풀이해서 들으면 그야말로 숲 속 나무와 풀잎 위에 소리 없이 맺히는 자그마한 이슬을 느낄 수 있다.
왜 이슬인가? 이슬은 맑은 날 이른 아침에 풀잎이나 나뭇잎에 맺혀 있는 작은 물방울이다. 지표면 가까이에 있는 공기가 수증기를 더 이상 머금을 수 없는 상태에서 냉각되면 이슬이 맺힌다. 바람이 없는 맑은 날 습도가 높을 때 가장 잘 맺힌다.
공기가 품고 있는 기체인 따뜻한 수증기가 차가운 물체에 닿을 때 액체가 되는 것이 이슬이다. 따뜻한 수증기가 공기에 가득 찰 때, 따뜻한 기체가 차가운 물체에 맞닿을 때, 기체가 액체로 바뀔 때 생기는 이슬. 그러나 이슬은 바위와 같은 크고 견고한 물체가 아닌, 작은 잎사귀 위나 끝에 맺힌다.
대림 4주에 노래하는 이슬은 따뜻한 수증기가 가득 차듯이 하느님의 따뜻한 은총이 온 세상에 가득할 때 생긴다. 그리고 그 이슬은 하느님의 은총이 이 땅에 살고 있는 우리와 맞닿을 때 생긴다. 그것도 이 땅의 가까운 곳에서.
더구나 고통받고 희망이 사라져 버린 찬 물체와 같은 인간과 맞닿을 때 생긴다. 이슬은 아주 작게 조용히 부드럽다 못해 너무나도 약한 인간 위에 맺힌다. 그런데도 이슬은 몇몇 잎에만 맺히지 않는다. 모든 잎과 나무에 무수히 맺히듯이 모든 인간에게 맺힌다. 대림 4주에 우리는 이런 이슬이 하늘에서 내려오기를 노래한다.
이 노래의 이슬은 누구신가?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이 되어 주리니”(호세 14,6). 이분은 하느님이시다. 사랑으로 충만한 하느님께서 인간의 목마름을 채우시려고 차디찬 인간이라는 풀잎 위에 이슬이 되어 맺히신다.
4월 중순부터 10월 중순까지 1년의 반은 비가 거의 내리지 않는 이스라엘에서 밤에 내리는 이슬은 그야말로 단비와 같다. 그분은 고통받는 인간에게 의로움이시며 땅을 여시는 분이시고 구원이 피어나게 하는 분이시다.
그런데도 그분은 크고 넓으며 교만한 물체 위에는 맺히지 않으시고 아주 작고 좁고 긴 연약한 잎에 맺히는 분이시다. 그래서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이슬처럼 말구유에 약하게 조용히 맺히셨다.
김현승 시인이 지은 ‘흙 한 줌 이슬 한 방울’이라는 시가 있다. “우리의 흙 한 줌 / 어디 가서 구할까. / 누구의 가슴에서 파낼까? / 우리의 이슬 한 방울 / 어디 가서 구할까.” 이 시인은 나를 먹이고 목마름을 해결해 줄 이슬 한 방울을 찾고 있다.
그러나 이사야서에서는 이슬은 고통을 받는 모든 이들 위에 하늘에서 무수히 작은 모습으로 내려오기를 갈구하고 있다. 주님이 오심을 이렇듯 갈구하는 시기가 대림 시기다.
어느 성령 봉사자에게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하느님의 은총은 아주 조용히 한 방울 두 방울 메마른 낙엽을 적시는 것과 같다고, 뭐, 이런 작은 몇 개 물방울이 언제 저 낙엽을 적시겠나 하지만, 메마른 낙엽 같은 내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덧 은총에 흥건히 적셔져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고.
하느님의 은총은 그렇게 매일 우리에게 찾아오신다고. 그러니 우리는 가슴으로 매일 이 노래를 불러야겠다. “하늘아, 위에서 이슬을 내려라”라고.
출처: 가톨릭평화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