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인이역(一人二役), 한 사람이 두 사람 구실을 한다는 뜻이다. 한 사람이 두 가지 일을 동시에 맡는 일신양역(一身兩役)과 비슷한 말이다.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의 지킬(하이드) 역을 맡은 배우, 최근 개봉한 영화 「허삼관」에서 감독과 주연을 한 하정우 같은 존재를 가리킨다.
일인이역의 의미를 넓히면 우리 이웃에도 여럿 있다. 아동센터에 봉사 나가며 살림 돌보는 어머니, 맞벌이하며 아기 키우는 ‘직장맘’, 의사이면서 방송 활동하는 ‘닥터테이너(의사+연예인)’, 낮에 일하고 밤에는 대리 운전 기사로 일하는 ‘투잡족’…. 이렇게 보면 일인이역을 넘어 일인다역을 하며 지내는 사람이 꽤 많을 것이다.
직업은 아나운서이지만 선생 노릇도 하며 지낸다. 대학에 출강하기 때문이다. 거기에 글품 팔기도 하니, 아나운서와 교수 두 몫에 이어 일인삼역을 하는 셈이다. 방송은 빛나고, 교육은 보람 있고, 글쓰기는 세상을 차분히 돌아보게 한다.
셋의 주어를 바꾸어도 크게 달라질 것은 없다. ‘글쓰기는 빛나고, 방송은 보람 있고, 교육은 세상을 차분히 돌아보게 한다’처럼 말이다. 그래서 학생을 만나는 일과 방송, 글쓰기 중에 어느 것이 더 좋고 보람 있는가를 따지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요즘은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느낌이 없지 않다. 무럭무럭 자라나는 학생들을 보기에 그렇다. 신춘문예에 당선된 학생의 문자를 받고, 지상파 방송 아나운서에 합격했다며 울먹거리는 학생의 전화를 받고, 같은 회사의 후배가 되어 인사하는 학생의 방문을 받고,
선생님 강의에서 만난 학우와 백년가약을 맺게 되었으니 주례로 모시고 싶다는 학생의 청까지…. 선생 노릇이 보람 있다는 건 이런 학생들 덕분만은 아니다. 여전히 취업 준비생인데 어떻게 해야 하나, 이성 친구와 계속 만나야 할까,
원하던 고향 직장에 취직했으니 내려오시면 대접하겠다…. 미주알고주알 속내를 털어내며 기대어 오는 학생들 덕택이기도 하다. 훌쩍 커버린 아들과 딸의 하루하루가 그들과 겹쳐있는 까닭도 무시 못할 것이고.
‘단언컨대, 재수강 덕분입니다!’ 신춘문예에 당선된 작가가 보낸 문자 메시지이다. 2년 동안 같은 강의를 들으면서 학점 투정하지 않은 기특한 학생의 당선 보고이기도 하다. 번듯한 작가가 되어 전한 화려한 복수가 갸륵하다.
‘선생님의 답신에 힘입어 아나운서의 꿈을 이루었다’던 학생은 ‘선생님과 함께 등장하는 게 영광’이라며 「아나운서클럽 회보」의 사진을 찍어 보냈다. 돌이켜 보면 내가 해 준 것은 없는데 내 덕분이라 하니 무안할 뿐이다. 스물 남짓한 청춘들이 나를 머쓱하게 한 힘은 무엇일까 곱씹어 본다.
아마, 어찌 보면 도덕 교과서를 읊어대는 것 같은 뻔한 말 덕분이 아닐까 싶다. ‘잘 되는 것보다 중요한 게 잘사는 것이다. 여러분이 잘살아야 하는 까닭은 내 아이들과 시대를 함께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학기 내내 빠지지 않고 하는 말이다. 별거 아닌 말 같지만, 반응은 그렇지 않다.
학생들의 가슴 울리는 느낌이 강의실을 가득 채우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제 자식 대하듯 자신들을 여긴다 생각하기 때문이고, 말 뿐인 당부가 아니라 그렇게 살려 발버둥 치는 걸 알기 때문일 것이다.
말 따로 행동 따로인 이른바 ‘유체이탈 화법’에 절레절레 고개 젓게 하는 세상에서 우리 교실은 그렇지 않다는 믿음을 스스로 키워가는 슬기로운 학생들. 그들을 보면서 우리 일상과 신앙의 삶이 지행합일, 언행일치이기를 기원한다.
출처: 가톨릭평화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