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난한 산골 마을/ 몸이 아파 사흘째 누워만 계시던 할아버지가/ 해 질 무렵에 스스로 일어나/ 마당을 한 바퀴 둘러보고/ 감나무 아래 잠시 서 있기도 하고/ 장독대 앞에 앉아 키 작은 채송화도 바라보고/
신발장 문도 살며시 열어보고/ 집 안에 다시 들어와/ 옷장에 걸린 옷도 만져보고/ 장롱 안에 있는 이불도 만져보고/ 방마다 한 번씩 누워도 보고/ 걸상에 한참 동안 앉아 있다가/ 방으로 들어가셨다./
그다음 날, 새들은 잠에서 깨어/ 새로운 아침을 여는데/ 할아버지는/ 감은 눈을 뜨지 못하셨다.
겨울이 지나고 다시 봄이 오고 있습니다. 우리 아들딸이 다닌 ‘간디학교’ 학부모로 만난 인연으로 서정홍 시인이 보내준 「밥 한 숟가락에 기대어」(보리)라는 시집을 꺼내 ‘밤 사이에’라는 시를 읽으며 새봄의 새 아침을 맞이합니다. 서정홍은 경남 산청의 황매산 기슭 산골 마을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농부 시인입니다. 천사라는 뜻의 안젤로라는 세례명이 썩 잘 어울리는 형님입니다.
날이 풀리면서 팽팽하던 연줄이 ‘툭’ 하고 끊어지듯 세상을 떠나는 어르신들이 생깁니다. 장성한 자식들은 도회지로 다 나가고 홀로 농사를 지으며 살다가 죽음을 맞이하는 노인들의 부음을 들으면 애잔한 마음이 앞섭니다. 번잡한 도시 한복판에서 아무 연고도 없이 홀로 쓸쓸하게 살다가 ‘고독사(孤獨死)’한 이들에 관한 기사를 읽으면 늘 가슴 한쪽이 저립니다.
저는 팔순의 어머니와 직장에 다니는 딸과 함께 서울에서 살고 있습니다. 제 아내는 경남 산청의 지리산 자락 산골 마을에서, 치매를 앓고 계신 구순의 장모님 수발을 들며 아들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군 복무를 마치고 농사를 짓겠다고 내려간 아들과 이웃과 함께 손수 집을 짓고 있습니다. 이제 그 마을 어르신들한테서 ‘삼밭골댁’이라는 택호도 받았습니다.
10여 년을 벼르다 땅을 마련했을 때 마을 어르신들이, “삼을 키우던 삼밭이라 사람이 살기에 좋은 곳인데 제대로 임자를 만났구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삼이 자라다 꺾이면 품질이 좋은 베를 짜지 못하기에 바람이 세면 곤란한데, 바람이 고르고 햇살도 좋은 땅이라는 삶의 지혜가 담긴 축하 말씀이었습니다. 집 짓는 일도 다들 관심을 갖고 살펴보아 주십니다.
우리 나이로 올해 여든이신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시대의 징표를 읽으려면 젊은이들과 노인들 말에 귀를 기울이라고 권고하십니다. 교황님 말씀대로 인류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 우리를 미래로 열어 주며 구조나 관습의 향수에 매달리지 않게 해 주는 게 젊은이들이라면, 노인들은 기억과 경험의 지혜를 지니고 있습니다.
교황님 권고대로 젊은이와 노인들 말에 더 귀를 기울여야겠다고 다짐합니다. 농부 화가가 되려는 젊은이, 제 아들의 어릴 적 별명은 성씨 때문인지 ‘배추’였습니다. 아내와 아들과 함께 산골 마을에서 배추도 심고 시도 써볼 날을 기다립니다. 밤이면 촛불을 켠 방 안에서 묵주를 들고 십자고상을 바라보는 깊은 사랑의 눈길을 가진 노인으로 늙어갈 모습을 그려봅니다.
“순동 어르신,/ 이른 아침부터 어디 가세요?”// “산밭에 이름 지어 주러 간다네.”// “산밭에 이름을 짓다니요?”// “이 사람아, 빈 땅에/ 배추 심으면 배추밭이고/ 무 심으면 무밭이지. 이름이 따로 있나.”(서정홍, 이름 짓기)
출처: 가톨릭평화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