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든을 훌쩍 넘긴 어머니는 기도하는 곳으로 꾸민 당신 방에서 촛불을 밝히고 묵주 알을 굴리십니다. 한 달에 한 번꼴로 내려가는 대구의 어머니 집에서 늘 맞닥뜨리는 새벽 광경입니다. 어머니는 당신이 누구보다도 더 많이 기도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나 봅니다.
돌아가신 아버님 생각, 6남매와 그들 가정의 안녕, 다 키워 가슴에 묻은 둘째 형님 영혼의 구원을 비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그뿐만이 아닌 걸 저는 잘 압니다. 요즘 들어 “종남이가 성체를 모셔야 할 텐데”라고 입버릇처럼 하시는 말씀을 통해서요.
제가 첫 영성체를 했던 시절로 잠시 돌아가겠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았고,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한창 시행되던 때지요. 그때 우리 가족은 집에서 10리쯤 떨어진 칠성성당에 다녔습니다. 지금 고성성당인 그곳은 공단을 끼고 있었지요.
제일모직, 대한방직 등이 설립돼 대구가 섬유 도시로 급성장함에 따라 일손이 크게 부족해 여학교를 갓 졸업한 영남 각지 처녀들을 대거 데려다가 야학을 운영하면서 일을 시켰지요. 어린 처녀들이 고향 부모 형제를 그리며 눈물짓던 객지는 선교의 황금어장이었지요.
당시 본당 주임 신부님은 연세가 많으신 이기수 야고보 신부님이셨습니다. 유학을 마치고 갓 돌아와 부임한 보좌 신부님에게 마흔 명이 넘는 기숙 여공들이 단체로 예비신자 교리를 신청했을 때 “젊고 잘생긴 신부가 오니까 마귀들이 들끓는구나” 하시며 직접 나서서 교리를 맡으셨답니다. 그 시절 젊고 활동적이었던 어머니는 경남 산청 처녀 ‘종남’이 누님을 첫 대녀로 맞아들였습니다.
저의 집안은 대대로 딸이 귀했습니다. 1962년생 여동생이 조부모께는 11번째 만에 생긴 첫 손녀여서 온 집안 어른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듯이 누님도 마찬가지였지요. 어머니의 대녀를 떠나 아버님의 장녀요, 우리 형제들의 큰 누님이며, 온 친척의 피붙이였지요. 주말이면 모든 가족은 누님을 오길 기다렸고 도란도란 밤 깊도록 얘기를 나누곤 했지요. 누님도 스스럼없이 한가족이 되었고요.
그렇게 여러 해를 같이 지내다가 혼기를 맞은 누님은 어느 날 팔공산 등반을 하다가 만난 개신교 신자와 열애에 빠져 결혼을 하게 되었지요. 그 일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다른 가족과 달리 아마 어머니는 그토록 사랑했던 딸에 대한 배신감, 대녀 교육에 있어서 자책감, 다른 교우들을 대할 때 느끼는 수치심으로 크게 상처받고 악몽에 시달리셨을 겁니다.
오랜 세월 기도하면서 어머니에게는 대녀에 대한 애(愛)와 증(憎) 중 사랑만 남았다는 걸 저는 압니다. “종남이가 성체를 모셔야 할 텐데…”라는 말씀을 통해서요.
육체적으로는 ‘인간은 섭취한 음식물의 총합에 다름 아니다’는 유물론이 득세하겠지만, 성체를 모시는 것은 이와 정반대이지요. 예수님께서는 당신 몸을 먹는 사람을 당신처럼 거룩한 사람으로 변화시켜 강생구속의 신비를 무결하게 완성하십니다.
오늘따라 누님이 몹시 그립습니다. “누님! 어머니 돌아가시기 전에 우리 예전처럼 밥 한번 함께 지어 먹어요!”
출처: 가톨릭평화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