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세상에서 제일 귀하고 좋은 책은 성서이다. 다음으로 가장 귀하고 좋은 책은 ‘한국 천주교회사’라고 말하고 싶다. 성서는 삶의 의미와 영원한 행복과 사랑을 가르치는 책이요, ‘한국 천주교회사’는 그 성서의 가르침대로 ‘살아온 기록’이기 때문이다.”
감수성 강하던 시절 저의 가슴에 신앙의 불꽃을 지피시던 고 박도식 도미니코 신부님은 당신이 엮은 「103위 순교성인전」 서문을 그렇게 여셨습니다. 또 많은 이가 1984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 방한하셔서 김포공항에서 무릎을 꿇고 땅에 친구(親口)하시며
“순교자의 나라, 순교자의 땅”이라고 되뇌시던 모습을 우리 교회사 중 최고 명장면으로 꼽는 데 망설이지 않습니다. 이 두 가지 얘기는 ‘우리가 1만 명이 넘는 순교자의 거룩한 피를 위대한 신앙 유산으로 물려받았음’을 자타가 공인한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말해 줍니다.
1946년 9월 16일, 복자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순교 100주년 경축행사를 시작점으로 순교자 현양 및 시복시성 운동이 본격적으로 펼쳐져 이미 103위 성인과 124위 복자가 탄생하였고, 하느님의 종 최양업 토마스 사제 외 252위의 시복도 청원 중입니다. 전국 곳곳 성지 개발 역시 여러 사람의 노력에 힘입어 가히 상전벽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외국으로 성지순례를 떠나는 사람은 많지만, 국내로 찾아오는 외국인은 거의 없습니다. 삼천리 방방곡곡에 성경의 가르침대로 살아온 영성이 촘촘히 깃들어 있는데도 말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활동하신 이스라엘, 가톨릭 교회 본산인 바티칸, 성모님의 발현지와 같은 그리스도인들의 버킷리스트와 절대적으로 비교하기는 적절하지 않겠지만, 산티아고나 다른 성인들 삶의 터와는 경쟁(?)할 만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문화 한류가 맹위를 떨치고 있는 데다 때마침 한국 순교성지가 교황청 세계 공식 순례지로 지정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정기 성지순례단 일원으로 국내 성지를 자주 순례하지만 다녀온 후 늘 갈증을 느낍니다. 그 해갈의 실마리를 산티아고를 한 달간 순례하고 돌아와 “내가 빙그레 웃으면서 죽으면 이번 순례의 추억 덕분인 줄로 아시게”라고 하신 어느 선배의 말에서 붙들어 봅니다.
순례의 묘미가 보고 배우는 데 있지 않고, 느끼고 묵상하는 데 있는데도 불구하고 국내 성지에는 순례자를 위한 숙소가 없어서 대부분의 순례가 허겁지겁 당일치기로 끝나기 때문에 항상 아쉬움이 남지 않나 싶습니다. 짧게는 이틀, 길게는 한 달 이상 순례하고자 하는 이가 휴식을 취하기 위해 호텔이나 여관, 찜질방을 찾아 헤맨다면 순례가 아니라 방황이 될 것입니다.
반경 30~40㎞ 사방으로 숙식을 해결할 수 있는 성지가 있어 어느 성지에서나 새벽에 파견 미사를 봉헌한 후 목적지를 향해 자신과 순교자들의 삶과 죽음을 묵상하며 걸어가고 그곳에서 다시 내일 떠날 채비를 하고…. 그래서 신자 비신자 구분 없이 또 내외국인을 막론하고 삶에 지친 모든 이가 다시 시작할 힘을 얻고 인생의 의미와 삶의 지혜를 깨닫는 한류 특유의 순례의 길을 만드는 일은 신앙 선조의 거룩한 희생을 향하여 후손인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할 화답이 아닐까요?
출처: 가톨릭평화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