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제 며칠 뒤에는 입춘입니다. 계절의 발걸음은 새봄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씩 다가가고 있습니다. 벌써 목련은 손가락 한두 마디의 크기로 잿빛 꽃봉오리를 가지 끝마다 달고 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주 삼라만상의 자연 현상은 신비가 아닌 것이 없고 아름다움이 깃들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오래된 나무에서 연둣빛 새순이 피어나는 것도 그렇고 여름날 비 온 뒤 하늘에 걸리는 무지개, 숲을 스쳐 지나오는 소소한 바람 소리에서도 하느님의 숨결을 느낍니다.
구부러진 시간과 공간의 길을 따라 도는 우주의 아름다움은 신비를 넘어 경외감마저 갖게 됩니다. 저희보다 위대한 신에 숨겨진 어떤 힘과 마주할 때도 두려움으로 경외감을 가지게 됩니다. 아마도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불에 타지 않는 떨기나무 앞에 섰을 때 그랬을 것입니다.
이런 신의 성품을 가진 과학자가 아인슈타인이 아닐까 합니다. 그는 매우 영적인 과학자였습니다. 아인슈타인은 1936년 1월 19일, 뉴욕의 주일학교 학생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습니다.
“존경하는 아인슈타인 박사님께, 우리 주일학교 수업에서 질문이 나왔어요. 만일 박사님이 우리의 질문에 대답해준다면 우리는 영광스럽게 생각할 거예요. ‘과학자도 기도하나요? 그리고 한다면 뭘 위해 기도하죠?’ 저는 엘리스 선생님 반 6학년입니다.”
아인슈타인은 우주를 바라보는 관점을 새롭게 발견한 과학자였습니다. 그는 우주 천체의 시간과 공간, 빛에 대해 연구하면서 보이지 않는 어떤 영이 존재함을 느끼게 됩니다. 자신이 발견한 과학적 성과를 뛰어넘는 신비하고 아름다운 것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믿었습니다.
연약하고 불완전한 지식을 가진 인간은 우주에서 서서히 자신의 힘을 드러내는 무변광대한 우주와 자연의 신비를 보고 경외감을 갖는다고 했습니다. 그는 신에 대한 존경과 경외가 종교의 본질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삶을 마무리하는 여생을 신비로운 우주 저편에 존재할 것 같은 어떤 영에 대한 묵상으로 보냅니다. 그래서 자신은 종교인 축에 든다고 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우주의 신비와 아름다움을 창조한 어떤 영에 대해 알고 느끼는 것이 진정한 종교의 핵심이라고 강조합니다.
유다인이었던 아인슈타인은 ‘지혜의 시작은 주님을 경외함이며 거룩하신 분을 아는 것이 곧 예지’(잠언 9,10)임을 어렸을 때부터 체득했는지도 모릅니다.
아인슈타인은 주일학교 어린이에게 답장을 보냅니다. “1934년 1월 24일, 필리스에게, 네 질문에 되도록 간단하게 대답할 수 있도록 해볼게. 과학자들은 인간에게 일어나는 사건들이 기도에 영향을 받는다고 믿지는 않아. 그러나 자연의 힘에 대한 지식이 완전하지 않아 결국 궁극적인 영의 존재를 믿고 있는데 그런 믿음은 일종의 신앙이지. 과학을 진지하게 탐구하는 사람은 어떤 영이 우주의 법칙에 드러나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지.”
아인슈타인은 어린이의 신앙에 대해 조심스럽게 배려하며 자연의 신비에 대한 신앙 혹은 우주의 법칙에 대한 경외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느님을 인간을 위한 도구로 생각하는 종교를 순진한 종교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도 신에 대한 존경과 경외가 인간에게로 이어지기를 내심으로는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주 저희의 주님 온 땅에 당신 이름, 이 얼마나 존엄하십니까! 하늘 위에 당신의 위엄을 세우셨습니다.… 당신의 하늘을 우러러봅니다. 당신 손가락의 작품들을, 당신께서 굳건히 세우신 달과 별들을”(시편 8,2-4).
출처: 가톨릭평화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