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단상] 126. 나의 ‘대부’ 최인호

이대현 요나(문화체육관광부 홍보협력관)
이대현 요나(문화체육관광부 홍보협력관)

‘2008년 여름, 나는 암을 선고받고 수술을 받았습니다. 가톨릭 신자로서 앓고, 가톨릭 신자로서 절망하고, 가톨릭 신자로서 기도하고, 가톨릭 신자로서 희망을 갖는 혹독한 할례 의식을 치렀습니다.’

스스로 ‘고통의 축제’라고 이름 지은 의식은 2013년 9월 25일 저녁 막을 내렸다. 나의 ‘대부’ 최인호 선생님은 그렇게 주님의 품으로 떠났다. 아버지를 잃은 그 날 밤, 함께하지 못한 날들과 함께하지 못할 날들이 애통해서 나는 울었다.

처음 “곧 나으리니, 그때 보자”고 했을 때, 그렇게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루빨리 돌아와 소설가로서, 가톨릭 신자로서의 소망인 예수님의 생애에 관한 길고 긴 글을 쓰시라고, 미하일 불가코프가 죽기 전 10년 동안 실명을 무릅쓰고 썼다는 「거장과 마르가리타」를 뛰어넘는 거작을 기다린다고. 3년 뒤, 친필 서명의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를 받았을 때도 그 믿음은 변하지 않았다. 이제 ‘청년 최인호’로 돌아와 깊고 푸른 도시의 구석구석을 힘차게 누비시라고.

난 바보였다. 그 긴 시간 동안 그가 느꼈을,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두려움과 외로움, 죽음의 공포와 절망, 눈물의 기도를 알지 못했다. ‘손톱과 발톱이 빠지는 고통 속에서’라는 말속에서도 태산 같은 아픔과 간절함,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다는 절망감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읽지 못했다.

그를 위한 기도 한번 제대로 안 했다. 이제야 비슷한 아픔을 2년째 겪고 있는 아내를 보고, 유고집 「눈물」을 뒤늦게 읽으면서 그 어리석음과 무심을 후회한다.

‘운명’인지도 모른다. 기자 시절(한국일보 문화부)인 20년 전, 후배가 “최인호 선생 전화”라며 건네주었다. 나를? 문학 담당도 아닌데. 잘못 알았겠지. “나, 최인호요. 오늘 신문에 쓴 기사 잘 읽었소. 감동적이었소”라고 한마디 하고는 끊었다. 트랜스젠더가 된 하리수의 인터뷰였다. 천하의 글쟁이 최인호 선생이 칭찬을? 그것도 잘 모르는 사람의 글을. 놀랍고, 기뻤다.

인연은 이렇게 시작했다. 그리고 2006년 여름, 주님과 약속한 지 16년 만에 세례를 받을 때, 그는 “신앙을 가지면 훨씬 글이 깊고 넓어질 걸세”라면서 기꺼이 나의 ‘대부’가 됐다. 많은 것이 닮았다고 생각했다. 아니 닮고 싶었다. ‘하늘에서 내려온 빵’을 받아 모시는 영성체가 너무나 궁금해 성당에 다니게 된 것에서부터 평생 청년의 열정과 순수함으로 글을 쓰고 싶다는 소망까지.

“하느님께 소원을 빌게나. 첫 영성체 때의 소원은 무엇이든 들어주시니까.” 세례식 때 그에게 그의 대부가, 나에게 나의 대부가 한 말이다. 그의 말대로 주님은 “영성체로 내 몸을 깨끗이 씻어 달라”는 나의 소원을 들어주셨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나는 돌아서면 어느새 정신과 몸에 다시 고통과 미움, 분노와 두려움, 불신과 자만, 나태와 욕심으로 더러워지곤 한다. 그때마다 주님의 몸과 피를 찾는다.

성체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하루도 제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어리석은 아들. 스스로 ‘영혼의 영양실조에 빠져 있는 사람’이라는 아버지 역시 그랬던가 보다. 누구보다 애절하게 주님의 양식으로 살았으며, 그 은혜로 주님을 찬양하는 글을 쓰고 싶어 「눈물」의 마지막에까지 “성체가 너무 고픕니다”라고 고백한 나의 대부님. 이제는 주님 곁으로 갔으니 목마르지도, 배고프지도 않으리라.

이제 대부를 다른 사람으로 하라는 사람도 있다. 그럴 마음도, 그럴 수도 없다. 그는 여전히 내 가슴 속에 살아 계시며, 하늘나라에서도 나의 ‘대부’이니까. 나에게는 그런 어른이 한 분 더 계신다.

출처: 가톨릭평화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