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시없을 나의 소중한 ‘인연’에 관한 이야기다. 군에서 제대하고 막 복학한 1983년 가을 어느 일요일. 서울 성북구 삼선교 근처에 동생과 방을 얻어 생활하던 나는 일요일이면 늘어지게 자고 오후 2시쯤 집 근처 식당에 가서 점심을 사 먹곤 했다. 가난한 지방 유학생이니 기껏해야 칼국수나 김치찌개가 고작이고, 아침을 거른 탓에 배가 너무 고파 늘 밥 한 그릇으로는 모자랐다.
그날도 그럴 작정이었다. 그런데 누군가 새로운 ‘인연’을 맺어 주기 위해서 그랬을까. 몇 번 갔던 식당들이 약속이나 한 듯 문을 열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다른 곳을 찾아 어슬렁거리던 내 눈에 들어온 간판 ‘목동’. 식당에 어울리지 않은 이름, 별다른 장식 없는 작은 4층 건물에 메뉴도 간단했다. “이런 집들이 대체로 비싸지. 그렇지만 오랜만에 제대로 된 점심 좀 먹어볼까.”
머뭇머뭇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곳에서 나는 두 번 놀랐다. 먼저 나의 선입견을 깬 여주인의 모습과 태도. ‘단아하다’는 표현이 정말 어울리는 머리가 희끗한 50대 중년의 맑은 얼굴에 따뜻한 미소. 단번에 학생이 와서 먹을 식당은 아님을 알아차렸다.
후회는 구석 자리에 앉고 나서 더욱 확실해졌다. 평소 자주 먹는 음식값의 두 배. 너무 부담스러웠다. 손님이라도 많으면 슬그머니 도로 나가버릴 텐데. 점심시간이 지나 손님이라고는 나 혼자다. “할 수 없다. 제일 싼 갈비탕 먹고, 다시는 여기에 오지 말자.”
고기가 오랜만인 데다 배도 고프고, 무엇보다 맛도 좋아 허겁지겁 먹었다. 추가 부담이 걱정되고 눈치도 보였지만, 맛있는 국물이 남았고 배가 채워지지 않아, 내친김에 밥 한 그릇을 더 달라고 해 말끔히 비웠다. 계산을 하는데, 여주인이 이북 억양이 섞인 다감한 목소리로 말했다.
“추가한 밥값은 안 받을게요. 갈비탕 생각나면 우리 집에 가끔 와서 먹어요. 밥은 언제든 마음껏 먹어도 되니까.”
나중에 들었지만 처음 내가 들어서는 순간, 지방에서 온 가난한 학생, 이런 곳에 오기 어려운 형편이라는 것을 짐작했다고 한다. 그래서 안쓰러운 마음에 한 번이라도 더, 조금이라도 더 ‘맛있는 음식’을 먹도록 해 주고 싶었다는 것이다.
윤님파님과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됐다. 나는 한 달에 두어 번 큰 맘 먹고 목동에 가서 갈비탕을 먹었고, 그때마다 따뜻이 맞아 주었으며, 여동생이 한때 기자를 해서인지 나의 선택을 누구보다 크게 축복했고, 결혼 직전에 개신교에서 가톨릭으로 바꾼 아내의 대모가 됐다.
처음에는 전혀 몰랐다. 그가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고, 이상하게 생각한 이름인 님파가 세례명이며, 전통 깊은 가톨릭 집안의 딸이라는 사실을. 갈 때마다 신부님과 수녀님들, 신학생들이 보였지만 식당이 신학교와 성당(혜화동) 가까이에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신앙과 나눔, 봉사가 너무나 크고 한결같아 신부님들 사이에서 그를 모르면 ‘간첩’이란 소리를 듣는다는 것도 한참 후에야 알았다.
세월이 흘러 머리도 많이 빠지고, 주름도 늘고, 힘도 없어졌지만, 우리 가족에 대한 사랑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다. 아이들의 성장을 누구보다 대견하게 지켜보면서 아드님에게 대부 역할을 맡겼고, 아내가 아프자 눈물로 기도했고, 신앙수기 당선을 기쁨과 감사로 축복했다. 어떤 이는 그를 마르타에 비유하지만, 난 그에게서 성모님을 본다.
주님이 하시는 일에 우연이란 없다. 돌아보면, 그리고 지금 나의 삶을 보면, 1983년 가을 어머니와 자식으로 이어지는 그와의 첫 만남 또한 ‘반드시 그렇게 되리라’는 주님의 뜻이었으리라.
출처: 가톨릭평화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