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모 마리아님의 ‘평생 동정’과 관련하여 꽤 난감한 사건을 경험한 적이 있다. 5년 전 스페인을 여행하고 있을 때였다. 가우디의 성가정성당을 보고 난 후였다. 한 남성이 도발적인 언사를 던졌다. “마리아는 평생 동정으로 살지 않았어요. 신약성경에도 나와 있잖습니까.”
아니, 이럴 수가! 나는 그 사람의 말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지만, 성경 지식이 빈약한 처지여서 대응에 한계가 있었다. 옆자리의 아주머니들이 발끈했다. “듣자 듣자 하니 너무하네요. 무슨 망발입니까? 성경을 얼마나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성모님을 모독하지 마세요!”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자매님들은 같은 성당에 다니는 독실한 신자들이었다. 자칫 ‘종교 전쟁’이 일어날 뻔했다.
많은 프로테스탄트들이 마리아의 ‘평생 동정’을 부정하고, 가톨릭에 대해 ‘마리아교’라는 비난을 서슴지 않는다. 참 고약한 사람들이다. 가톨릭교리신학원에 들어 온 후 ‘마리아론’ 수업을 많이 기다렸다. 다른 학우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대부분이 비슷한 경험을 했고, 도발에 대비한 ‘쉽고 간결한’ 방어 논리를 찾고 있었을 터였다! 마리아론 공부는 그래서 재미있다. 교수님은 학생들의 이런 욕구를 아시는 듯, 개강 첫날부터 주요 쟁점별 대응 논리를 확실하게 가르쳐 주었다.
마태오 복음(12,46-47)과 마르코 복음(6,3)의 ‘형제 이야기’나 루카 복음(2,6)의 ‘첫아들 이야기’는 어떻게 된 것일까. 형제니 첫아들이니 하는 표현은 고대 근동 지역의 관행적 호칭이다. 4촌 6촌도 형제라 불렀고, 심지어 조카도 형제라 했다.
또 새댁이 처음 아들을 낳으면 무조건 첫아들이라 했다. 그래도 찜찜하다. 뭔가 2% 부족한 느낌이다. 형제 논쟁에 대한 결정타는 요한 복음(19,27)에 있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하신 말씀이다. “그 제자에게 ‘이 분이 네 어머니시다’고 말씀하셨다.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
그 제자가 바로 요한 사도이다. 만약 예수님에게 피붙이 형제가 있었더라도 제자에게 어머니를 부탁했을까?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5년 전에 이것을 알고 있었더라면!
마리아는 예수님을 낳기 이전에도 깨끗했고, 낳는 과정에서도 깨끗했으며, 낳고 난 뒤에도 깨끗했다. 그래서 ‘평생 동정(ever Virgin)’이다. 마리아는 요셉의 부인이었지만 ‘부부 관계’가 없었다. 동정부부였다. 하느님은 그래서 요셉에게 특별한 복을 주신 것일까. 죽을 때 하느님(예수님)을 상주로 둔 사람은 요셉이 유일하다.
“성모 신심의 핵심은 순명입니다. 절대 순명! 복음서의 이 두 구절만은 꼭 암기해 두세요. 루카 복음 1장 38절과 요한 복음 2장 5절! 마리아는 이토록 하느님에 대해 순명하셨습니다. 믿음의 모범이지요. 그래서 상경지례(上敬之禮)로 마리아를 공경하는 것입니다. 기말고사 때 논술 문제로 나올 수도 있어요. 꼭 그렇다는 것은 아니고요…. 그 정도로 중요한 내용이라는 이야기입니다. 혹시 모르지요 뭐….”
중요성을 이렇게 강조해 주다니, 자상도 하시다. 다들 한바탕 웃었다.
멜 깁슨의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The Passion of The Christ)는 ‘예수의 수난’과 함께 ‘마리아의 순명’도 그리고 있다. 마리아는 십자가 위의 예수님에게 말한다. “내 살에서 나온 아들이여. 내 영에서 나온 영이여. 나도 함께 죽게 해다오.”
순명이다! 순간 모자의 눈이 마주친다. 예수님은 “다 이루었도다!”는 말을 남기고 절명한다. 마리아의 얼굴이 클로즈업된다. 신비스러운 광채가 흐른다. 지복직관(至福直觀)! 순명이 가져다준 선물이다.
출처: 가톨릭평화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