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 수도 프놈펜의 남서쪽 외곽에 ‘사랑의 선교회’ (Missionaries of Charity) 수녀원이 있다. 동네 사람들은 수녀원 설립자의 이름을 따서 그냥 ‘마더 데레사 수녀원’이라고 부른다. 이 수녀원은 좀 특별한 곳이다. 에이즈 환자들이 살고 있다. 가족으로부터, 친구로부터, 사회로부터, 국가로부터 철저히 버림받은 사람들이다. 수녀님들이 그들을 보살피고 있다.
그곳에서 하루라도 자원봉사를 하고 돌아올 때면, 마음이 천근만근 무거워진다. 어른 환자도 어른 환자지만, 코흘리개 꼬마 환자들 때문이다. HIV바이러스 보균자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이다. 그들은 엄마 몸속에 잉태된 순간부터 환자였다.
이 꼬마들이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런 형벌을 받아야 한다는 말인가. 철부지 꼬마들은 자신의 ‘실존적 상황’을 전혀 모른 채 천진난만하게 뛰어논다. 커 가면서 언젠가 알게 될 것인데…. 그때 얼마나 많은 정신적 충격을 받을까. 수녀원에 갈 때마다 요한복음(9,1-3)의 눈먼 사람 이야기가 떠올랐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보셨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스승님, 누가 죄를 지었기에 저이가 눈먼 상태로 태어났습니까? 저 사람입니까, 그 부모입니까?”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다. “저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그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런 것이다.” 예수님은 이 눈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해 주셨다.
예수님은 그래도 이 눈먼 사람들에게 개안의 축복을 내려 주셨다. 해피엔딩이기에 얼마나 다행인가. 그러나 마더 데레사 수녀원의 아이들은 무엇인가 말이다. ‘전지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느님’과 ‘착하디착한 아이들에게 찾아온 이유를 모를 시련’ 사이에는 무슨 인과관계가 있는가.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잘 모르겠다.
자원봉사자들이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꼬마 환자들과 즐겁게 놀아주는 것이다. 모두 안다. 철부지 꼬마 때 얼마나 뛰놀고 싶은가를. 그러나 그들은 같이 놀 친구가 없다. 자원봉사자들은 그래서 그들과 즐겁게 놀아주어야 한다. 그게 쉽지 않다. 다 큰 어른이 코흘리개 꼬마들과 몇 시간 즐겁게 논다는 게 쉬운 일인가.
서울에서 자원봉사를 온 대학생들과 체험 나눔을 할 기회가 있었다. 그들은 이미 지쳐 있었다. 격려 겸해서 맥주 한잔 하면서 이야기를 들었다. 나눔이 깊어질수록 분위기가 무거워져 갔다. 급기야는 한 여학생이 펑펑 우는 게 아닌가. 그는 독백처럼 심중의 이야기를 쏟아놓았다.
“오늘도 아이들에게 과자를 똑같이 나눠 주었어요. 저는 그게 슬퍼요. 그들은 그런 평등한 사랑만 받고 살잖아요. 사람이 평등한 사랑만으로 살 수 있나요? 때로는 나 혼자만 빵을 받아먹는 기쁨도 있어야 하지 않나요? 내가 누구엔가는 절대적 존재이고, 그 사실을 그런 방식으로 확인하는 것도 중요하지 않나요? 그게 진짜 사랑 아닌가요? 절대적 사랑! 아이들이 그런 절대적 사랑을 태어나서 한 번도 받아보지 못했을 것 같아…, 슬퍼요.”
맞다. 사람은 때때로 자기 자신만을 원하는 사람을 사랑하고 싶을 때가 있다.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지만 똑같지 않다. 그런데 ‘똑같은 사랑’만 하라고? ‘특별한 사랑’도 하고 싶은데! 부모님의 절대적 사랑을, 하느님의 절대적 사랑을 서로 확인해 보는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