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철없는 아내에게 평생 처음 고함질러 아들 유골 메고 산티아고 순례길 완주한 영화 생각나
2012년 7월, 산티아고 순례길 피레네 산맥을 넘을 때였다. 악천후를 만났다. 빨간색 판초 우의 속으로 빗물이 스며들고, 무거운 배낭은 온몸을 내리눌렀다. 발걸음은 더뎌졌다. 불과 30m 앞이 보이지 않았고, 강한 비바람 때문에 체온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길가에 있는 순례자 무덤의 십자가를 보면 가슴이 오싹해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온몸의 체온이 점점 떨어지는 것 같았고 불안감은 점점 공포심으로 변하고 있었다. 질퍽질퍽한 길은 걸음을 옮기는 것조차 무척 힘들게 만들었다.
이곳에서 내 생명이 끝나는 것은 아닐까? 아내 데레사는 지금 어디에 있는 걸까? 아내는 눈에 보였다가 사라지길 반복했다. 뒤돌아 보면 연신 “아름답다!”는 탄성을 터트리며 사진을 찍어 대고 있었다. 십자가와 나무, 길, 안개, 묘지 등 아내에게는 모든 것이 다 신기한 듯했다. 카메라 셔터를 쉴새 없이 눌렀다. 아내가 보이지 않아 오던 길을 되돌아가 보면 아내는 여지없이 사진을 찍고 있었다.
‘철없는 사람…’ 화가 나기 시작했다. 때로는 사진에 나를 꼭 집어넣어야 한다며 가뜩이나 힘든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초점을 맞추고 구도를 잡는데 왜 그리 시간을 끄는지…. 생각할수록 화가 커졌지만, 입 밖으로 그저 “많이 춥다”는 말만 나왔다. 아내에게 내면의 공포심은 절대 말하지 않았다.
질퍽한 언덕길에 도착했을 때 또 아내가 보이지 않았다. 수차례 불렀으나 인기척이 없었다. 공포심을 느끼면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아내는 엎드려서 한 개체에 카메라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안심되면서도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남편은 죽을 지경인데 부인이란 사람은 계속 감탄사를 연발하면서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아이처럼 사진을 찍어 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고함을 질렀다. 아마도 내 평생 처음 나온 큰 고함이었을 것이다. 깜짝 놀란 아내는 오히려 화를 냈다. 아내에게 악천후는 어떤 의미도 없어 보였다. 빗길에 발견한 커다란 민달팽이가 너무나 신기해 사진을 찍으려 했으나 추위에 꽁꽁 언 손가락이 말을 듣지 않아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나는 고함을 지른 후에야 알게 되었다. 한동안 침묵 속에 길을 걸었다.
집사람은 내 뒤를 따라오면서 그 무언가를 계속 찍어 댔다. 유럽 최대 너도밤나무 숲이 옆에 있는 캄캄하고 인적이 없는 길을 둘이서 하염없이 걸었다. 출발해서 22㎞ 정도 지난 곳에 왔을 때였다. 저 멀리 자전거로 순례하던 순례자 3명이 기진맥진한 모습으로 길옆 작은 언덕에 몸을 기대고 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들도 너무 힘들었는지 우리를 보고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우리도 다르지 않았다.
순례길에서는 다른 순례자를 만나면 ‘부엔 까미노!’(좋은 길)라고 인사하는 것이 관례지만, 그들도 우리도 아무런 인사를 나누지 못했다. 추적추적 내리는 안개비가 서먹서먹한 분위기를 감춰줄 뿐이었다.
피레네 산맥을 넘는 레포에다 고갯길은 일명 ‘나폴레옹 루트’라고도 불린다. 악천후 때는 바람, 비, 영하의 날씨, 짙은 안개등으로 저체온증이나 심장마비 사고가 많은 구간이다. 그때 그 길을 걸었을 때 단상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The Way’(길)라는 영화가 있다. 나폴레옹 루트에서 발생한 사고로 아들을 잃은 후 아들의 유골을 메고 산티아고 순례길 800㎞를 완주한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출처: 가톨릭평화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