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즘 전 뼛속으로 스며드는 한기처럼 미세한 두려움이 밀물처럼 왔다가 사라지는 경험을 여러 번 합니다. 그 후엔 오금이 저린 것처럼 찌릿한 것이 뒷맛이 좋지는 않았습니다. 이게 뭘까요? 이 두려움은 어디서 오는 걸까요? 의심해 보면서 제게 짚이는 것 중 하나는 아마 이것이 제 삶 속 밑바닥에 흐르는 죽음의 현존이 아니겠느냐는 생각을 해 보게 됐습니다. 꼭 제가 시한부 판정을 받은 사람인 것처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 신경세포가 삶과 죽음의 경계 안에 서 있다는 자각을 하게 되는 거죠.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죽음의 의미 또한 여러 가지입니다. 생물학적인 죽음, 의미론적인 죽음도 있을 겁니다. 제가 유독 죽음에 관심을 많이 가지게 된 것은 배우 훈련을 통해서입니다. 배우 훈련 중 하나는 바로 저의 바라보기 싫은 부분을 바라보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누구나 자신의 치부나 싫은 점을 바라본다는 건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저의 이기적이고 교만하고 사람을 도구화하는 그런 비인격적인 면을 직면하는 것도 어렵지만, 그걸 인정하는 건 죽기보다 싫은 경험입니다. 배우로서 카메라 앞에 서거나 무대 위에서 공연하기 전에 무척 두렵습니다. 감독이나 관객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저를 휘감아 버리고 이걸 통해서 제 욕망을 실현하고 싶은 생각이 온통 나래를 펼치기도 합니다. ‘내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보여 주겠다’는 그 욕구와 욕망 말입니다.
이 어처구니없는 생각에서 깨어나 다시금 제가 해야 할 일, 바로 연기의 한 장면으로 절 다시금 데려다 줄 수 있는 건 바로 절 죽이는 겁니다. ‘대단하다는 생각 자체가 아직 멀었다는 증거다’라는 인정이죠. 그런 욕망의 소리가 들릴 때마다 찬물을 끼얹는 거죠. 바로 깨어나는 겁니다.
이 깨어남을 통해서 어느 것이 중요한지를 깨달을 수 있는 감각이 돌아오는 겁니다. 위의 말씀처럼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바로 자신의 단단한 에고(ego)에만 갇히게 되면 어떠한 열매도 맺지 못하는 겁니다. 제가 저의 욕망에 갇히다 보면 다른 주위의 소리나 소통에 무뎌지게 되고 끝내는 고립되는 경우가 생깁니다. 무대 위에서 그런 경험을 해 본 적이 많이 있습니다. 그 순간은 정말 지옥 같습니다. 도망가고 싶고 다 그만두고 싶어집니다.
한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서 수많은 붓을 꺾는 예술가들의 이야기를 접하면서도 붓을 꺾는다는 건 바로 작은 죽음을 의미하며 그 죽음을 통해서만이 세대를 초월한 작품이 나온다는 걸 자주 보게 됩니다. 꼭 죽음이 예술가들만의 고뇌는 아닐 겁니다. 매 순간 죽음을 받아들일 때만이 현재를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욕망에만 휩싸여 있는 삶을 떠나 무뎌진 심신을 비우고 자신이 유한한 존재임을 인정할 때 더욱 진하게 느껴지는 생명력은 더 성실한 삶으로 초대합니다.
찬 바람에 실려 오는 나무 타는 냄새, 아이를 씻기고 머리를 말려 주면서 느껴지는 아이의 체온과 솜털 하나하나, 아이의 웃음소리, 뉘엿뉘엿 지는 노을빛, 저녁 기도를 위해 켜 놓은 초 타는 소리, 이 모든 경험이 얼마나 제 삶을 충만하게 해 주는지요. 이것이 주님께서 지금 제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뭣이 중헌디’라는 명대사처럼 무엇이 중요한지를 알게 해 주고 이제 제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알려 주시는 거죠.
우리는 늘 같은 시간과 같은 일들의 반복으로 쉽게 지치고 지겨워합니다. 그런데 매 순간 자신을 비우는 연습을 통해 삶이 충만해질 때 자극적인 것들을 덜 찾게 되는 담백한 삶으로 변화될 것이라 믿습니다. 그 담백함 안에 예수님이 자리하고 계심을 고백합니다.
출처: 가톨릭평화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