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단상] 143. 박해 시대의 가톨릭 의료인

채규태 알비노(가톨릭대 의대 교수, 한센병연구소장)
채규태 알비노(가톨릭대 의대 교수, 한센병연구소장)

천주교에 대한 극심한 박해가 끝나고 마침내 조선 왕조와 프랑스 사이에 맺은 조불수호조약(1886년)으로 신앙의 자유를 얻었지만, 천주교 의료기관이라고는 전국 큰 도시 몇 군데의 시약소, 고아원뿐이었다. 조미수호조약(1882년) 이후 세브란스병원과 의과대학을 세운 개신교 측에 비하면 아주 미약하였다.

실제로 의료 선교사 알렌이 1885년 한국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제중원을 세우고, 그 이듬해 신입생 16명으로 제중원의학교를 열어 한국 최초의 서양의학 교육이 시작된다. 천주교가 조선교구 설정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성모병원을 1936년 5월 개원하고, 1954년 5월 신입생 40명의 성신대학(가톨릭대) 의학부를 출범시켰으니 병원 창설은 50년, 의과대학은 70년 뒤진 셈이다.

가톨릭 의료사업을 말할 때 성모병원을 먼저 언급하는 이유는 전국에 산재한 소규모의 시약소, 고아원, 의원 등을 아우르는 기관으로 성모병원이 점차 성장하게 되었고, 수녀원, 수도원, 각 성당이 운영하던 소규모 기관들을 마치 묵주알 묶듯이 하나의 유기체로 연결하는 역할을 해주었기 때문이다.

의사 3명, 무료봉사 간호 수녀 10명으로 시작한 30병상 미만의 작은 성모병원은 80년 동안 교수 및 임상강사 이상 봉직 의사 1000명과 6000병상, 매출액 2조 원을 넘는 대규모 의료집단인 가톨릭중앙의료원으로 폭발적 성장을 하게 되었다.

가톨릭대 의대 교수의 한 사람으로서 이 놀라운 성장의 정신은 어디에서 출발하였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아시다시피 우리 대학 부속병원의 명칭의 공통점은 ‘성모’다. 우리를 위해 당신 아들 예수님께 중재해 주시는 성모님의 도우심과 의사, 간호사를 비롯해 모든 종사자가 환자와 그 가족을 정성스럽게 섬기는 마음으로 근무하고 있다. 우리 병원이 유독 다른 대학 병원에 비해 의료 사고 건수가 적고, 환자나 가족의 불만이 적은 이유도 이런 데 있다고 본다.

뿌리를 찾기 위해 조선 왕조시대 가톨릭 의료인은 어떤 모습으로 기록되어 있는지 1801년 황사영(알렉산델)이 조선 교회를 관할하는 중국 북경의 구베아 주교에게 보낸 백서를 찾아보았다. 그 속에서 가톨릭 의료인의 원형을 찾아볼 수 있었다.

이중배(마르티노)는 본래 의술을 알고 있었으나 그다지 정통하지 못하였다. 원수의 밀고로 감옥에 끌려가 병에 대해 문의하는 사람이 있으면 먼저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그런 다음 침을 놓고, 약을 처방해 주어 열이면 열, 백이면 백 낫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 갇혀 있는 고을 군수도 이중배에게 와서 약 처방을 얻어갔다고 하였다.

하루는 감옥의 관리가 의서를 좀 보여 달라고 하자, “내게 의서는 없소. 다만 천주님을 공경할 뿐이요. 당신도 의술을 배우고 싶거든 천주님을 믿으시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옥리가 “책들은 다 불태웠는데 무엇으로 배운단 말이오” 하니 마르티노는 웃으면서 “내 가슴속에 불타지 않는 책이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사람들을 계몽하여 교회에 나오도록 하기에 족하다”고 대답하였다.

박해 시대 간호사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여 가톨릭 간호사의 뿌리라고 볼 수 있는 성 김효주(아녜스), 성 김효임(골롬바) 자매의 부조는 과거 명동 성모병원 출입문 벽에 설치되었고, 지금은 가톨릭대 의과대학에 있다.

오늘날 외래에서 하루에 50명 이상의 과다한 환자들을 돌보고 있는 의과대학 교수에게 복자 이중배(마르티노)처럼 환자에게 처방하기 전에 주님의 도우심을 청하는 기도를 먼저 하라고 부탁드리고 싶다. 한 사람 한 사람 따로 하지 않아도 아침기도 속에서 오늘 만나는 환자들에게 주님의 자비와 평화가 함께하기를 빌어 주면 그날 하루의 외래 업무가 훨씬 부드러워진다.

출처: 가톨릭평화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