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리고 또 몇 년이 흘러갔다. 하루하루가 격변하는 역사였다.
6월항쟁의 그 무더위 속에 명동성당 일대가 최루가스에 눈물을 흘리고, 훗날 ‘넥타이 부대’라고 불리게 되는 젊은 사회인들이 시위에 동참하는 변화와 함께 군사정권의 긴 질곡이 끝나는가 싶었다. 대통령 직선제라는 그 그립던 날이 현실이 되었는가 했다.
선거가 시작되고, 월간 「신동아」의 의뢰로 부평역 광장에서 노태우 후보의 유세 현장을 취재하던 날이었다. 관중들이 돌아가고 쓰레기만 날리는 텅 빈 역 광장을 뒤로하고 돌아오며 나는 슬프고도 우울한 예감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적중했다. YS와 DJ의 분열로 노태우는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는 내가 국군보안사에 끌려가 고문을 당할 때 그곳 사령관이었다.
작가에게 ‘조국’을 떠난다는 것은 ‘모국어’를 떠나는 것일 수도 있었다. 노씨가 대통령인 나라에서 살 수는 없지 않은가 하는 결심은 궁핍을 넘어서서 차라리 가련함이었다. 그러나 선택할 길이 없었다.
가족을 끌고 찾아간 일본에서 살고 있을 때였다. 놀라운 우연이 찾아왔다. 당시로서는 불가능했던, 국교수립 이전의 중국을 여행할 기회가 왔던 것이다.
그리고, ‘중국을 간다’는 생각에만 들떠서 따라나섰던 여행에서 성라자로 마을의 이경재 신부님,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회의 레티치아 수녀님과 일행이 되었으니 그것은 내 생애를 묶는 행운의 황금매듭이었다.
그분들과 9명이 일행이 되어 열흘 가까운 중국 여행을 하던 도중, 나에게 세례를 주도록 이경재 신부님께 압력(!)을 넣자는 모의가 이루어지는 것을 나는 몰랐다.
도대체 내가 어떻게 생겨먹었기에 ‘한수산이는 세례만 주면 분명히 잘 믿을 사람’이라고 그분들이 판단했단 말인가. 그때 내가 드린 첫마디가 “저 가톨릭 3수생인데요”였다.
그리고 며칠 후, 나는 백두산 천지에서 ‘요한 크리소스토모’로 새롭게 태어나는 세례의 영광을 안았다. 백두산 천지가 비췻빛으로 내려다보이는 모래 언덕에서였다. 수녀님도 대부님도 함께 해주신 일행들도 세례식은 기쁨의 눈물로 넘쳤다.
그날, 백두산을 내려와 자정이 넘어서야 연길의 숙소로 돌아왔다. 몸을 닦고 기도를 드리기 위해 짐을 풀었을 때였다. 이것을 어쩔 것인가. 장춘에서 중국 측 연구소로부터 선물로 받은 도자기 술병이, 깨질까 조심하며 속옷으로 싸고 또 싸고 잠옷으로 둘둘 말아서 가방 한가운데 넣었던 술병이 새면서 온 가방 안으로 적시고 있지 않은가.
목욕을 하고 그중 덜 젖은 속옷으로 갈아입고 무릎을 꿇고 앉았다. 눅눅하게 술에 젖은 옷에서 술냄새가 솔솔 솟아올랐다. 무릎을 꿇고 바닥에 이마를 대고 엎드렸다. 몸을 감싸는 그 지독한 중국술 냄새라니.
주님, 오늘 제가 주님의 아들이 되어 무릎을 꿇고 앉았습니다. 그런데 이 꼴입니다. 술 냄새를 솔솔 풍기며 첫 기도를 드립니다. 그러나 주님, 제 삶이 술냄새를 풍기며 비틀거리더라도, 제 믿음만은 흔들리지 않게 지켜 주셔야 합니다. 언제나 제 곁에 계시면서 그것만은 해 주셔야 합니다.
그날 나는 취재노트에 이렇게 적었다.
“주여, 저는 종이옵니다. 저를 치소서, 제가 울리겠나이다. 저를 때릴 때마다, 제가 울겠나이다. 주여, 저는 이제 칼이옵니다. 저를 들어 자르소서. 언제나 푸르게 날을 세워 주님께서 쓰실 그날을 기다리겠나이다.”
출처: 가톨릭평화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