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단상] 132. 글의 진실, 글의 힘

이대현 요나(국민대 언론정보학부 겸임교수)
이대현 요나(국민대 언론정보학부 겸임교수)

기자 시절, 나는 ‘오자(誤字) 대장’이었다. 원고지에 쓸 때는 전혀 없던 오자가 컴퓨터로 글을 쓰면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데스크를 보는 선배가 틀린 곳을 빽빽하게 고친 원고를 보여주면서 핀잔을 준 적이 부지기수다. 내가 데스크를 맡자, 그 선배의 축하 겸 걱정의 한마디도 “오자 대장이 오자를 잡게 생겼네”였다.

오자는 30년 가까이 글을 쓰면서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칼럼, 평론은 물론 신앙체험수기에까지 튀어나온다. 이유는 하나다. 자판 사용이 서툴면서도 쓴 글을 다시 읽어보지 않기 때문이다. 변명이 아니다. 정말 그것이 싫다. 나만 아니다. 글쓰기를 업으로 하면서도 자기가 쓴 글이 밉기라도 하듯 “보기 싫다”며 두 번 다시 읽지 않은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

길든 짧든, 무엇에 관해 썼든, 글은 곧 자신이기 때문이다. 머리를 쥐어짜서, 생각을 굴려 쓴 글일수록 더욱 그렇다. 배우가 열연한 작품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이 더 어색하고 민망하듯이. 어쩌면 자신의 글도 연기라는 생각이 들어서일지도 모른다. 아무리 자연스럽고, 솔직해 보여도 연기는 연기일 뿐이다.

신앙체험수기 ‘주님, 저한테 왜 이러십니까’ 를 읽고 많은 사람이 메시지를 보내왔다. 누구보다 아내와 청주 성모 꽃마을에서 함께 지내며 암 치유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분들의 반응이 유난했다. “다 읽을 때까지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는 감정이 흥건한 글도 있었다.

가까이 있었지만, 미처 몰랐던 아내의 아픔과 기도를 확인하면서, 그것을 자신의 아픔과 고백으로 받아들이는 ‘공감’ 때문이었으리라. 불안과 고통의 시간을 보냈거나, 보내고 있는 그들에게 잠시나마 나의 글이 ‘힐링’이 되었다면 감사할 뿐이다.

이런 감사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나의 글도 배우의 연기가 아닐까’하는 자괴감으로 기쁨보다 부끄러움이 앞선다. 신앙, 체험, 수기, 이 세 가지 모두 100% 진실하다고 말할 자신이 점점 없어진다. “어찌 너는 그 알량한 글재주로 아내를 속이고, 자신을 과장하고 미화하고 속이려 했느냐”는 주님의 꾸짖음이 들린다.

돌이켜보면 생각만큼 기도도 간절하지 못했고, 아내와 아픔을 온전히 함께하지 못했으며, 그런 나의 게으름과 이기심을 솔직하게 쓰지 않았기에 그 꾸짖음을 달게 받는다. 분명 어떤 곳에서는 표현할 언어를 찾지 못해 과장을 했고, 어떤 곳에서는 굳이 다 이야기할 필요까지 없다면서 빼버리기도 했다. 소설이라면, 영화라면 상관없다. 허구니까.

수기는 자기 손으로 쓰는 자기 고백이다. 진실하지 않으면 처음에는 그럴듯하게 보일지 모르나 시간이 지날수록 공허하다. 죽은 글이 된다. 신앙체험수기가 나로 하여금 “글의 아름다움은 무엇이며, 글의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에 대한 질문을 다시 한 번 던지게 했다. 답은 둘 모두 숨김과 보탬이 없는 ‘진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일 것이다. ‘성경’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나의 수기가 사람들의 가슴에 조금이라도 닿았다면, 그 역시 미약하나마 진솔함을 발견했기 때문일 것이다. 두 번 다시 읽고 싶지 않은 자기 글, 오자투성이인 자기 글을 쓰지 않은 길도 분명하다. 알면서도 다른 핑계를 대며, 자신이 없어서 애써 외면해 왔을 뿐이다.

이제부터라도 그 길을 가야겠다. 어쩌면 이런 다짐도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그러나 더없이 고마운 ‘신앙’이란 이름을 앞에 붙인 ‘체험수기’와 이 ‘칼럼’을 쓸 기회를 주신 주님의 은총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출처: 가톨릭평화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