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상길 요한(전 외교부 대사)2011년 9월 30일은 우리 부부에게 역사적인 날이다. 하루가 우리 인생 역정에 찬란하게 기록되기 위해 열리고 있었다. 이슬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우의를 입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흐린 하늘은 비를 계속 뿌렸다.
첫 번째 산티아고길 순례 중 고소산(산티아고 대성당을 5㎞ 정도 남겨둔 곳)에 이르기까지 한 번도 비를 맞은 적은 없었다. 9월의 하늘은 높고 파랬다. 오후가 되면 햇볕을 피해 그늘을 찾을 만큼 더웠지만, 그래도 초록색 들판과 파란 숲이 있어 다행이었다. 그런데 이슬비가 쉬지 않고 내렸다. 무슨 의미일까?
산티아고 초입부터 출근 차들이 경적을 울리며 달렸다. 매우 혼잡스러운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복잡한 도로를 건너고 길바닥에 있는 가리비 껍질로 만든 표지를 열심히 보면서 걷고 또 걸었다. 온몸은 땀에 젖었다. 매우 긴장되는 순간들이었다.
많은 순례자가 산티아고 중심 대로를 걷고 있었다. 높은 건물들 사이의 구부러진 길이었다. 모퉁이를 몇 번이나 돌아야 했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이 나타나길 기다렸다. 발걸음이 빨라졌다. 그때 누가 소리쳤다.
“Ha salido un arco iris!” (무지개가 떴다!)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하늘에 무지개가 걸려 있었다. 정말 아름다운 일곱 빛깔 무지개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의 하늘에서 내려와 한 장소에 걸려 있었다. 바로 산티아고 대성당이었다. 기적인가, 축복인가. 우리는 서로 껴안았다. 눈시울이 붉어졌다. “축복을 받았다”고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기쁨과 신비가 온몸을 휘감고 돌았다. 고독과 고통이 함께한 순례길이었다. 이 먼 길을 걸어서 무사히 도착한 것에 대한 위로와 보상 같았다. 감사했다.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우리가 자랑스러웠다. 소망과 꿈이 이뤄진 순간이었다.
떠나기 전에 짊어지고, 내내 함께 했던 온갖 걱정이 한꺼번에 소멸하는 순간이었다. 많은 생각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카미노(‘길’ 또는 ‘걷다’, ‘순례자’를 복합적으로 의미하는 스페인어) 친구들, 축복 같은 날씨, 우리에게 안식을 준 알베르게(순례자 숙소), 인정 많은 스페인 사람들, 크레당시알 델 페레그리노(순례자 여권), 우리 아이들의 기도와 격려, 멀리서 우리를 걱정하고 격려해준 친구들과 이웃들,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깊은 마음으로 모두에게 감사드렸다.
우리 부부는 2011년 8월 31일부터 10월 3일까지 스페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800여㎞ 순례길을 도보로 완주하고 이듬해 7월 1일부터 8월 7일까지 두 번째 완주를 했다. 순례길을 두 번 걷고 난 후 평소 존경해 온 한 세계적 지도자의 말씀이 떠올랐다. 2013년 9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남아프리카공화국 넬슨 만델라 전 대통령의 말이다.
“내가 만약 27년간의 긴 세월을 감옥에서 보내지 않았다면 인생의 가장 어려운 과제인 자신을 변화시키는 일은 달성하지 못했을 것이다. 긴 세월 동안 감옥에 앉아서 생각하는 기회는 바깥세상에서 가질 수 없는 기회였으며 나의 영혼은 영원히 갇혀 있었을 것이다.”
우리 부부도 역경과 두려움을 무릅쓰고 이 순례 길을 걷지 않았다면 평범한 삶에 만족하고 살고 있을 것이다.
출처: 가톨릭평화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