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엄마, 갔다 오께.” 어머니는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것이 어머니와의 마지막 작별이 될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지난 5월 30일, 성모성월 끝자락에 어머니는 그렇게 하느님 나라로 가셨다.
다소 불안한 마음은 있었지만 그래도 그리 허무하게 떠나실 줄은 미처 몰랐다. 상담 건으로 서울에 도착하는 순간 휴대전화가 울렸다. 직감은 했지만 아니나 다를까. 식복사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부랴부랴 터미널로 달려가 버스에 올랐다. 형제들에게 급히 연락을 취하고 가면서도 마음은 바싹바싹 타들어 갔다. 묵주 기도를 바치면서 그래도 믿었다. ‘내가 내려가기 전까지 어머니는 결코 눈감지 못할 것이다!’
사제관에 도착해 “엄마, 신부 왔어. 눈떠봐, 응!” 하고 외치는 소리에 어머니는 천근 같은 눈을 간신히 뜨고 나를 바라보셨다. 세상에, 이 아들을 기다리느라 그 힘겨운 숨을 얼마나 버티셨는지…. 서둘러 병자성사를 드리고 마지막 포옹과 친구(親口)를 하며 강복을 드렸다. 형제들도 어머니와 작별 인사를 하고 나자, 어머니는 간신히 눈을 깜박거리고 고개를 끄덕이시며 응답하셨다. 그리고는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굵은 눈물 한 방울을 흘리며 마치 주무시는 듯 그렇게 조용히 선종하셨다.
꿈인지 생시인지 모른 채로 이틀이 지났다. 어머니와 내가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한 공주성당에서 교구장 주교님 집전으로 장례 미사를 봉헌하고 어머니는 유구성당 묘지에서 안식에 들어가셨다.
장례식을 마치고도 현실을 분간할 수 없었다. 정말로 어머니가 돌아가신 건지 실감 나지 않았다. 내가 안 보이면 한순간도 마음 잡지 못하고 불안해 하시며 하루에도 수십 번씩 나를 찾으시던 어머니가 어찌 말 한마디 없이 그토록 허망하게 떠나실 수 있단 말인가.
어머니와 나는 지금껏 한 번도 떨어져 지내본 적이 없다. 어려서부터 어머니는 반드시 내가 모신다고 생각했고, 신학생 때에도 신부가 되면 어머니는 형제들에게 맡기지 않고 평생 내가 모시리라고 결심했었다. 그걸 마땅하고 옳은 일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래서 보좌신부 기간을 제외하고는 여태까지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정신이 맑으실 때에는 어머니가 모든 걸 보살펴주셨다. 17여 년 전에 혼자 길을 건너다 교통사고를 당한 후로 기억력이 없어지고 치매를 앓으셨다. 남들은 어머니 모시며 산다고 ‘효자(孝子) 신부’라며 좋게 말해 주었지만, 사실상 어찌 내가 감히 어머니를 모셨다 할 수 있겠는가. 도리어 어머니가 나를 보살피고 모셔 주신 것이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어머니와 떨어져 본 적 없는 내게 어머니는 나의 연인이자 벗이었다. 이제 난 누구와 손잡고 다니며, 누구와 밥을 먹고, 누구랑 속닥거리며 눈을 마주친단 말인가. 이 막막하고 허망한 마음을 어찌한단 말인가.
어머니란 존재가 어느 자식에게나 극진하고 애틋하기에, 이 글을 쓰는 것이 마치 어머니를 잃은 상실감을 나만 겪는 것처럼 유난을 떠는 것으로 비칠까 염려된다. 그래서 평화신문 독자들이나 같은 처지에 있는 신부님들께는 매우 민망하고 송구한 일이다.
그러나 내 어머니를 잃은 상실감과 못다한 불효의 심경을 어떤 식으로든 표현해 봄으로써 고인에 대한 석별과 애도의 심정을 정리하고 싶은 마음에 펜을 들었다. 일평생 하느님만 의지하며 자식을 위해 분골쇄신하셨던 나의 어머니. 내게는 마리아요, 성모님이셨던 어머니는 그렇게 하느님 품으로 돌아가셨다. 아~ 말없이 떠난 야속한 사람아~!!
출처: 가톨릭평화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