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단상] 15. 오묘하여라, 주님의 그 뜻

한수산 요한 크리소스토모 (소설가)
한수산 요한 크리소스토모 (소설가)

<가톨릭 3수생- 6>

묻게 된다, 인간이 저지르는 행위 가운데 고문만큼 비인간적인 행위가 또 있을까. 한 인간의 정신과 육체에 ‘인간으로 살아가기를 포기’하도록 가해지는 이 폭력을 더욱 용서할 수 없는 것은, 그것이 인간이 만들어낸 정치와 제도가 자행하는 폭력이라는 데 있다. 그 처절함과 잔혹함을 넘어서서 고문이라는 악행은 그만큼 비열함의 극이다.

나는 벌레가 되어 있었다고 훗날 회상했다. 고문에서 풀려나 집으로 돌아온 나는 벌레처럼 살았다. 이따금 정신착란에 시달리면서 한밤이면 제주의 바닷가에 나가 모래밭을 뒹굴며 울부짖던 나날들,

집으로 돌아와 샤워 물줄기에 몸을 맡기고 서 있자면 흘러내린 모래가 희디흰 욕조 속을 마치 개미떼처럼 한줄기가 되어 흘러갔다. 그 모래를 바라보자면 어쩐지 푸른 지평선 같은 것이 떠오르고, 깊디깊은 슬픔의 저편은 푸르디푸른 빛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추상명사를 잃어버린 사람이 되어 있었다. 돈, 집, 자동차… 이불, 숟가락. 사람들은 이런 보통명사로 살아간다. 그러나 우리는 그 보통명사를 통해 끝내는 추상명사를 향해 나아간다.

어머니는 보통명사지만 모성애는 추상명사다.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지만 꿈, 가치, 의미, 뜻이라는 추상명사가 있기에 우리는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추상명사를 잃어버린 나는 다만 벌레였고, 누가 쥐어짜면 물이 흐르고, 닦으면 때가 끼는 걸레가 되어 있었다.

세례를 받고, 일본생활 4년을 끝내고… 나는 나이가 들어갔다. 그리고 어느 날, 우리 교회의 순교사를 소설화하겠다는 뜻이 열매로 맺히는 첫 작품이 시작되었다.

신문연재를 약속한 다음날 청주교구로 장봉훈 주교님을 찾아가 무릎을 꿇었다. 최양업 신부의 생애를 소설로 쓰기 시작합니다. 기도와 축복을 부탁드립니다. 그때 주교님이 탄식처럼 말씀하셨다. ‘주님이 하시는 일은 어찌 이렇게 오묘하신가.’

장 주교님은 최양업 신부의 생애를 많은 사람에게 알릴 수 있는 책을 쓸 사람을 오래 전부터 찾고 계셨다고 했다. 그런 뜻은 까맣게 모른 채 나는 또 먼 어디에서 최 신부의 생애를 그려내기 위한 꿈을 깎고 다듬고 부수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으니, 주님은 그렇게 다 마련하고 계셨던 것을.

주교관을 나섰다. 오후의 햇살 가득한 주차장까지 걸어갈 때였다. 한순간, 무언가 크고 엄청난 것이 내 무릎을 내려치는 것 같았다. 풀썩 그 자리에 주저앉을 듯 나는 휘청거렸다. 그것이었다니! 아, 그것이 다 당신의 뜻이었군요.

먼 훗날 순교자의 삶과 영성을 소설로 쓰겠다고 매달릴 저를 지켜보시면서, 허술하고 연약하기 짝이 없는 제 영혼을 담금질하기 위해 제가 그 일을 겪도록 하셨군요. ‘고문’을 모르고 어떻게 순교자의 삶과 영혼을 쓸 수 있겠는가.

기절에서 기절로 이어지는 순간의 고통을 모르면서 어떻게 주리가 틀리며 뼈가 부러지고, 불에 단 쇠꼬챙이로 살을 지져대는 고통 속에서도 주님을 향해 거룩하고 영롱한 눈빛을 잃지 않았던 저 순교자들의 영혼을 그려낼 수 있겠는가.

그것이었군요. 내가 겪은 고통은 피투성이로 너덜너덜해진 순교자가 주님의 곁으로 걸어가며 내뿜던 숨결 하나라도 느끼게 하려는 당신의 뜻이었군요. 아 그것이었단 말인가. 그 고문이, 그 절명의 순간들이 다 주님께서 마련해주신 불타는 목마름이었고 광야였단 말인가.

주님, 제게 주신 이 잔이 은총으로 넘치나이다.

 

출처: 가톨릭평화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