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른 아침 식사를 하고 프랑스 르아브르의 항구 풍경을 만끽하고 싶어 걸음을 재촉한다. 너무 일찍 도착하니 직원들 몇몇이 서둘러 출근하는 모습이다. 아침 시간 부둣가에 부는 바람이 상쾌하다. 키 큰 등대가 서 있는 르아브르 부두 앞, 뭉게구름 가득한 푸른 하늘 아래 앙드레 말로 현대미술관(MuMa, Muse Andr Malraux)이 서 있다.
이 미술관은 프랑스를 대표하는 문인이자 지성인 앙드레 말로(Andr Malraux, 1901~1976)가 샤를 드골 집권 시기(1945~1969)에 문화부 장관을 역임하면서 적극적으로 지원해 ‘앙드레 말로’ 미술관으로 불린다. 이곳에는 19~20세기 미술품이 소장돼 있다.
흰 콘크리트와 큰 유리로 이뤄진 미술관 건축은 매우 안정감 있고, 높다란 하늘을 조용히 떠받고 있는 느낌이다. 이곳을 방문한 것은 지난해 9월, 인상주의의 선구자, ‘외젠 부뎅, 빛의 장인’ 기획전이 막바지를 향하고 있을 때였다.
1845년 르아브르 현대미술관이라는 이름으로 개관하고 1900년 외젠 부뎅의 남동생인 루이 부뎅이 물려받은 그의 작품 240점을 이 미술관에 기증하며 오늘날 훌륭한 부뎅 컬렉션을 소장하게 됐다.
진정 미술사 속 대가인 외젠 부뎅을 기리기 위해서 프랑스의 공공미술관에 기증하는 것이 프랑스의 자긍심을 높이는 길이라는 생각에 내린 결정이었고 거의 6400점에 달하는 부뎅의 드로잉은 파리 오르세 미술관에 기증됐다.
작품 기증의 역사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 후로도 여러 컬렉터들의 작품 기증이 있었는데 대표적으로, 2004년 엘렌 센-푸(Hlne Senn-Foulds)가 소장한 매우 아름다운 인상주의 작품들을 기증함으로써 미술관의 품격과 가치가 더 높아지는 데 크게 기여했다.
총 71점의 유화, 130점의 드로잉 및 판화 그리고 5점의 조각 작품으로 모두 그녀의 외할아버지인 올리비에 센(Olivier Senn, 1864~1959)에게서 상속받은 것이다.
면화 사업가로 예술품 컬렉션에 일찍 눈을 뜬 그는 미술품에 대한 뛰어난 안목을 가진 자로 그가 특히 좋아한 화풍은 인상주의와 야수파 그림이었다. 뿐만 아니라 2014년에는 올리비에 센의 손주 사위인 피에르-모리스 마테까지 그의 부인에게서 물려받은 작품 17점을 추가로 기증함으로써 올리비에 센의 기증 작품 컬렉션은 더욱 풍요로워졌다.
‘부자는 삼대를 못 간다’고 하지만 고귀한 귀족 정신은 삼대를 넘어 계속 이어진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멋진 사례다. 유럽의 귀족주의를 비난하기도 하지만 학창시절을 벨기에에서 보내며 느낀 바로는 이들은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정신을 자연스럽게 실천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회적 특혜를 받은 이들은 자손 대대로 어떤 형태로든 사회를 위해 공헌해야 한다는 것을 마땅한 책무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돈’이 모든 가치의 중심인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지만, ‘예술’을 돈의 가치로 환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 그 자체’로 알아보고 이를 귀하게 여길 수 있는 사회, 더 나아가 더 많은 이들과 영원히 ‘공유’하기 위해 기꺼이 공공기관에 기증할 수 있는 이가 많은 사회가 진정한 선진국이다.
르아브르의 한 컬렉터 집안에서 행해진 고귀한 기부 행위에 감격하며 문화선진국의 의미를 생각한다. 돈, 물질이 아니라 정신, 문화적 유산의 가치를 최상의 것으로 여기고 이를 보존, 융성, 발전시키려 모든 정성을 기울이는 사회가 바로 문화선진국이다.
문화와 종교는 별개의 것이 아니다. 인간을 ‘아름다움, 진실됨 그리고 선함’으로 나아가도록 하여 ‘성숙한 정신’의 방향으로 이끌어주는, 즉 사회의 ‘어른 역할’을 하는 것이 진정한 종교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출처: 가톨릭평화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