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전제로 할 때, 찬미야말로 신과 인간을 가장 아름다운 관계로 이어주는 최상의 기쁨이라고 난 늘 생각해왔다.
하느님을 향한 인간의 찬미는 하느님께서 당신이 창조하신 인간들과 함께 영원한 기쁨을 나누는 일이기 때문이다.
구약에서 수없이 ‘하느님을 찬미하라!’는 말씀이 나오는 까닭도 그렇지만, 하느님을 향한 찬미가 사라졌을 때, 샘물이 마르듯 불행이 닥치고 마는 역사만 봐도 찬미가 얼마나 소중한지 알 수 있다.
따라서 믿음과 희망과 사랑 위에 찬미가 있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임기응변으로 말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찬미는 절대 그렇게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찬미는 진실과 기쁨이 없는 가식으로는 통하지 않는다. 제물을 올리듯, 맑은 영혼으로 온 정성과 온 겸양을 다 해야 그 진실과 기쁨을 교감할 수 있다.
바로 여기에서 시에서의 ‘찬미’라는 본질이 나타난다. 다윗이 있고, 단테가 있고, 타고르가 있고, 나 같은 사람도 있다. 시는 본질에서 제의적 찬미의 언어이자 진실과 기쁨을 담은 최상의 표현인 셈이다.
일찍이 시는 모든 문화예술의 제왕이었다. 인류 정신세계의 정수로서 고귀한 격조와 운율과 감동을 지닌 장르였다. 그럼에도 현대에 이르러 물질문화 풍조에 위축됐고, 언어의 지나친 실험과 해체와 굴절로 독자들로부터도 외면당하고 있다.
과연 진정한 시의 찬미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오늘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가치관의 혼란과 정서불안이 팽배해진 시대를 산다. 생태계 오염에서 비롯된 기후 변화는 물론 사회 곳곳에 잠재된 불신 풍조와 경쟁 구도로 몸과 마음과 정신과 영혼이 따로따로 놀고 정서 분열의 진통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시대다.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넘쳐나는 정보와 산업의 과잉생산 역시 찬미를 가로막는다. 겉으로는 풍요롭고 편리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물질 중심적 가치관과 인간이 처한 복잡한 내면의 허구는 하느님을 찬미할 겨를조차 없게 만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참된 기쁨의 가치를 회복하려면 하느님을 찬미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이고, 하느님과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영생의 기쁨은 찬미에서 비롯된다. 하느님을 찬미하는 기쁨을 되찾기만 하면, 누구든 현세의 근심과 걱정에서 어느새 벗어나게 되리라 믿는다. 해서 찬미의 아름다운 가치보다 더 기쁜 일은 없다.
그렇지만 찬미야말로 강한 의지가 필요하다. 거꾸로 가는 세태를 탄식하며 찬미의 정신을 살려 하느님의 은총을 찾아 나서는 일은 곧은 용기를 가져야만 하기 때문이다.
인생이 허망하다는 말마따나 신앙의 경지에서 보면 죽기에도 알맞고 살기에도 알맞은 세상이다.
그러기에 아직 살아 있을 때, 하느님을 찬미하는 일보다 더 나은 것은 없으리라.
사실 난 어디에도 거리낌이 없는 삶을 하루하루 살아내고 있다. 비록 가난과 고통을 겪는다 해도 하느님을 찬미하는 은총의 기쁨에 비한다면 오히려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하느님이 내게 주신 시의 탈렌트, 곧 하느님을 찬미하는 은총 안에서 오늘은 이렇게 봄꽃처럼 서정적 치유 기제로 피어나는 시의 길에서 찬미의 기쁨을 본다.
출처: 가톨릭평화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