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난은 내 인생의 절박한 화두였다. 가난을 극복하려는 의식에서 가난을 사랑하기까지의 여정이 내 삶을 관류해 왔기 때문이다.
가난은 내게 숙명이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가난을 산 사람을 위대하다고 생각해왔다. 그중에 가장 대표적인 분이 바로 예수님이다. 예수님의 가난은 자비의 원천이어서다. 가난은 예수님의 자비의 대상이며, 가난한 심정의 기점에서 구원을 이루신 까닭이다. 사실 예수님을 본받기 위해서는 가난한 삶에 대한 사명감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가난한 삶이 곧 그분을 사랑한 입증이기 때문이다.
나도 한때는 돈을 벌기 위해 안간힘을 쏟았다. 처자식을 먹여 살리려는 방편이기도 했지만, 가난에 신물이 났기 때문이었다. 가난이 나를 비참한 처지로 내몰면서 비굴하게 만드는 것에 대한 저항이기도 했다.
한편으로 가난을 벗어던지려고만 하는 물질적인 목적 역시 내 존재를 병들게 하는 요인이었다. 어쩌면 평생 가난의 종살이에서 벗어날 수 없을지도 모르는데 끝내 허덕이다 가는 것 아닌가 하는 불안에 휩싸이면 도무지 앞이 캄캄했다. 가난을 운명이라고만 여기기엔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갈림길에서 가치관의 갈등을 겪어야만 했다. 그야말로 가난이 병통이요 돈이 원수였다.
그런데,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루카 6,20)라는 예수님 말씀은 도대체 무슨 뜻인가. 더구나 바오로 사도까지 나서서 “그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여러분이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셨습니다”(2코린 8,9) 하시니, 실로 세상 물정 모르는 말씀들이 아닐 수 없었다.
세상 사람들이 부자로 살려고 저렇게 발버둥을 치는데, 어떻게 해서든 재산을 모으려고 갖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온갖 속임수와 권모술수까지 궁리하며 이익을 챙기려고 혈안인데, 가난이 행복이라니…. 예수님의 가난이 우리를 부유하게 한다니! 느닷없이 벼락을 맞은 것만 같았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돈 없으면 굶어 죽을 판인데도 말이다.
하지만 나는 가난이 진을 친 내 삶 터에서 예수님과 바오로 사도 앞에 무릎을 꿇고 통곡을 했다. 해도 해도 끝이 없는 비참하고 억울한 가난을 진정 사랑하게 해달라고 청원했다. 그 가난으로 당신을 찬미하겠다고 다짐하며 눈물로 나를 봉헌했다.
내 영혼이 병들지 않게 해달라고, 아니 모든 탐욕의 종살이에서 나를 해방해 달라고 간구했다. 죽기까지 내 가난과 자유를 헛된 욕망에 빼앗기지 않도록 지켜달라고 했다. 그러고 나서 가난과 친해지기 시작하니, 참으로 주님과 바오로의 행복이 나를 점령했다. 사실 주님을 찬미하기에는 가난이 보배였다. 가난 속으로 시의 은총이 쏟아졌다. 나는 아직 굶어 죽지 않았다.
“가난아, 가난아, 빛으로 애끓는 가난아! / 네 그리던 얼굴이 바로 나였더냐!/ 내 한 생애를 탕약처럼 청빈으로 달여 내서 / 목숨의 길이 사랑에 이르도록 애간장을 다 녹여서 / 마침내 고통도 제 고통에 겨워 이골이 나고 / 설움도 제 설움을 맞아 사무치게 해서 / 원망마저 제 울음에 지쳐 온몸을 여울지게 해서 / 끝내 기다림과 그리움이 절정에 달했을 때 / 운명이 불꽃 같은 이승의 숨결로 꽃대를 밀어 올려 / 만년 만생 시들지 않는 꽃으로 피게 해서 / 더는 죽어도 죽지 않을 영혼의 향기를 머금게 해서 / 영영 사라지지 않을 기쁨이 바로 나였더냐!”(졸시 ‘가난의 꽃’ 전문)
참으로 가난은 비참하고 비굴한 것이 아니라 영생 복락에 안겨든 간절한 사랑이었다.
출처: 가톨릭평화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