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린 시절, 인천 자유공원에는 사람의 얼굴과 손금을 종이에 그려놓고 관상을 보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붓으로 검게 그린 얼굴과 손금은 마치 죽은 사람처럼 무서웠습니다. 어느 날, 소년은 용기를 내어 관상 노인 앞에 쪼그리고 앉았습니다. 그러곤 손금을 봐달라고 했습니다.
노인은 돋보기를 꺼내 들고 손바닥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러고는 “넌 쉰 살을 넘기기가 힘들다. 손금이 중간에 토막 났어.” 집으로 돌아온 나는 필통에서 연필 깎는 칼을 꺼내 끊어진 손금을 팠습니다. 손바닥에선 피가 흘러내렸습니다. 어린 시절 죽음은 그렇게 나를 찾아왔습니다.
사순시기의 첫날은 ‘재의 수요일’입니다. 이날, 신부님은 성당에서 신자들 머리에 재를 얹으며 죽음을 기억하도록 다음과 같은 말을 합니다. “사람아,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다시 돌아갈 것을 생각하여라.”(창세 3,19) 나는 이 말이 너무 좋습니다. 그래서 매년 재의 수요일 미사에 참여하여 머리에 재를 얹으며 죽음을 생각합니다. 어린 시절 쉰 살을 넘기기 힘들다는 관상쟁이의 말을 상기하면서 이렇게 ‘오래’ 살고 있음에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머리에 재를 얹습니다.
맨부커상을 받은 같은 학교 문예창작과 한강 교수가 언젠가 나의 연구실을 찾아왔습니다. 책꽂이에 있는 책들을 살펴보고는 “죽음에 관한 책들이 많네요. 이런 책들을 읽게 된 사연이 있으신가요?” 하고 물었습니다. 당시 나는 죽음에 관한 책을 쓰고 있었습니다.
책을 쓰게 된 이유는 예술가를 꿈꾸는 학생들에게 ‘삶과 죽음’이라는 새로운 강좌를 개설하여 그들에게 삶의 소중함을 깨닫게 해주고 싶었고, 학생들이 죽음에서 예술 창작의 새로운 모티브를 찾을 수 있도록 해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죽음은 수많은 예술가에게 중요한 소재가 되었습니다. 문학, 영화, 음악, 연극, 드라마, 뮤지컬 등 모든 장르의 예술에서 죽음을 소재로 하지 않은 작품은 없습니다.
세상을 살다간, 또한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죽음에 대해 말합니다. 그들은 소크라테스나 플라톤과 같은 서양 철학자도 있고, 노자나 장자 같은 동양 철학자도 있습니다. 또한 사제, 스님, 목사, 시인, 소설가, 수도자, 의사, 학자, 인디언 등 갖가지 인물들이 등장하여 죽음에 대해 자신의 말을 들려줍니다.
봄바람처럼 부드럽게 살랑이는 글, 여름 소낙비처럼 쏟아져 내리는 글, 가을 하늘처럼 맑디맑은 글, 짙은 회색빛 겨울 하늘같이 차가운 글도 있습니다. 또한 플루트처럼 감미로운 글도 있고, 죽비로 내려치는 강한 글도 있습니다.
죽음이라는 무거운 책을 쓰면서 내가 찍은 사진들을 곁들였습니다. 밝고 아름다운 사진은 글과 함께 씨줄 날줄로 엮어지며 죽음을 더욱 가깝게 만나게 해줄 것이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삶이 없으면 죽음이 무의미하고, 죽음이 없으면 삶 역시 무의미합니다.
삶과 죽음은 한 형제처럼 나란히 함께 다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음을 떠올리기 싫어합니다. 허나 죽음을 이해하게 되면 삶은 한층 넓고 깊어집니다. 죽음을 공부하면 더욱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이 내가 죽음을 공부하면서 얻은 결론입니다. 그리스 비극 시인 소포클래스가 쓴 시 한 구절을 읽으면서 죽음을 묵상해보면 어떨까요? “내가 헛되이 보낸 오늘은 어제 죽은 이들이 그토록 바라던 내일이다.”
출처: 가톨릭평화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