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파트 14층에서 네 살 어린이가 베란다 난간에 올라갔다가 추락해 숨졌습니다. 온 가족이 함께 있었을 주말 오후에 어린이는 홀로 있다가 사고를 당한 것입니다. 그날, 할머니는 손자가 잠든 것을 확인하고는 밖에서 노는 다른 손자를 찾기 위해 아파트를 나왔습니다. 그 사이에 자고 있던 손자가 깨어나 부모를 찾다가 베란다 너머로 떨어져 숨진 것입니다. 그 시간에 어린이의 부모는 맞벌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사고에 가슴이 아픕니다.
한 장의 그림이 생각납니다. 르네상스 화가 라파엘로가 그린 ‘시스티나의 성모’입니다. 그림 한가운데는 성모님이 아기 예수님을 안고 구름 위에 서 있습니다. 바로 그 아래에는 아기 천사 둘이 턱을 받치고 성모님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늘에는 수많은 아기들이 있습니다.
아기들 각자가 지상의 부모를 선택해 가리키며 “저 부모의 아기가 되게 해주세요. 그곳으로 절 보내주세요”라고 성모님께 간구합니다. 성모님 좌우에는 귀한 모습을 한 두 사람이 있습니다. 왼편의 남자는 아기들이 가리키는 사람이 부모로서 적합한지 성모님께 말씀드리고 있고, 오른편의 여인은 그 말이 옳다고 미소 짓고 있습니다.
성모님은 아기를 한 명씩 품에 안고는 두 천사로 하여금 지상의 부모에게 데려다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천사는 아기를 안고 지상으로 내려옵니다. 이렇게 해서 아기들은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 그림은 자녀들을 어떠한 시각에서 바라봐야 할 것인지 분명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아기들은 ‘내 새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저 하늘나라에서 부모를 선택해 이곳까지 찾아온 ‘귀한 손님’입니다. 이러한 자녀관은 가톨릭 신앙을 갖고 있는 우리가 꼭 지녀야 할 중요한 가치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어린이를 바라보면 어린이가 그렇게 소중하고 사랑스러울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린이에게 욕을 해서도 안 되고, 때려서도 안 되고 방치해서도 안 됩니다. 독일에서는 이 그림을 유치원 벽에 붙여 놓습니다. 유아 부모와 유아를 가르치는 교사가 매일 이 그림을 보면서 유아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생각하게 합니다.
‘세대 간 손익의 제로섬 게임’(zero sum game)이라는 이론이 있습니다. 유아교육에서 매우 중요한 이론입니다. ‘적은 친자시간으로 부모가 이득을 보면 아이는 그만큼 손해를 보고, 많은 친자 시간으로 부모가 손해를 보면 아이는 그만큼 이득을 본다’는 이론입니다. 친자 시간(親子時間)은 ‘부모가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을 말합니다.
‘함께 있다’는 것은 물리적 가까움이 아니라 경험을 공유하는 심리적 가까움입니다. 이 이론을 쉽게 풀어보면, 부모가 자녀와 함께 있어야 하는 시간에 밖에 나가 돈을 벌면 버는 만큼(또는 지위와 명예를 갖는 만큼) 자녀의 정서 발달, 인지 발달, 신체 발달은 ‘손해’를 봅니다.
거꾸로 부모가 돈을 더 버는 것을 포기하고 자녀와 함께 있는 시간을 더 많이 가질수록 자녀의 정서·인지·신체 발달은 ‘이익’을 본다는 것입니다. 우리 집에선 누가 이익을 보고 있습니까? 누가 손해를 보고 있습니까?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어린이는 정말 소중히 보살펴야 합니다. 예수님은 어린이를 끌어안고 손을 얹어 축복해 주실 만큼 무척이나 사랑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마르 10,14)
출처: 가톨릭평화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