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단상] 196. “떠나라, 그리고 돌아오지 마라”

백형찬 (라이문도, 서울예술대 교수)
백형찬 (라이문도, 서울예술대 교수)

 

‘시간의 종말’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보았습니다. 병인박해 150주년을 기념해 만든 영화입니다. 파리외방전교회 오르간 연주자였던 구노의 ‘아베 마리아’가 피아노와 첼로 선율을 타고 흐릅니다. 그러면서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의 흑백사진이 점점 크게 비추어집니다. ‘떠나라, 그리고 돌아오지 마라.’ 이것은 파리외방전교회의 모토였습니다. 조선의 천주교 신자들은 교황님께 조선 교회 박해 상황을 알렸습니다. 앵베르 주교와 샤스탕·모방 신부가 새남터에서 순교했습니다.

경기도 의왕 청계산 기슭에 하우현성당이 있습니다. 그곳은 루도비코 신부 성인 성지이기도 합니다. 제대 맞은 편 벽에 커다란 그림이 걸려 있습니다. 제목은 ‘파견’입니다.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아시아로 떠나기 전, 가족 친지들과 이별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림 속에는 조선에서 순교한 네 명의 선교사가 있습니다. 루도비코, 헨리코, 유스토, 루카 신부입니다. 루도비코 신부는 충남 내포로 들어왔다가 이곳 둔토리 은신 동굴에서 체포되어 새남터에서 순교합니다. 순례하던 그 추운 겨울날, 성당 벽에 걸려 있는 루도비코 신부 흑백사진 얼굴에 붉은빛이 감돌았습니다.

경기도 용인 광교산 골짜기에 손골성지가 있습니다. 손골성지는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조선에서 선교하기 전에 조선 말과 풍습을 익히던 곳이었습니다. 헨리코 신부는 이곳에서 체포되어 새남터에서 순교합니다. 성지에 순교 100주년을 기념해 만든 헨리코 신부 현양비가 있는데, 석축 위에 돌 십자가가 올려져 있습니다.

그 십자가는 신부 고향 성당에서 신부 부친이 사용하던 맷돌을 재료로 해서 만든 것입니다. 십자가는 두 개가 만들어졌는데 하나는 신부 생가에 두고 나머지 하나를 이곳으로 가져온 것입니다. 순교자 현양 대회가 열리던 그 따뜻한 봄날, 성지 입구에 빨갛게 핀 꽃들은 마치 순교자들이 흘린 피 같았습니다.

충남 아산 공세리성당에 내포 지방 순교자 성지가 있습니다. 공세리성당은 고색창연한 아름다움으로 늘 영화나 드라마에 등장합니다. 박물관 안 대리석에 새겨진 편지를 읽고는 난 그만 숙연해졌습니다. “주교님, 아름다운 땅 조선으로 가라고 나흘 전에 발령을 받았습니다.

이 거룩한 땅 위에서 일하며 수많은 순교자들의 피에 저의 땀을 섞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너무 좋으신 분입니다. 1894년 7월 5일 파리에서 드비즈 신부” 신부가 주교에게 보낸 편지였습니다. ‘수많은 순교자들의 피에 저의 땀을 섞게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순종입니까? 신부는 서품을 받은 그 해, 제물포에 도착해 공세리본당 주임으로 활동하며 공세리성당이 내포 지방의 주춧돌이 되게 했습니다. 순례하던 그 아름다운 가을날, 순교자 현양비로 노랑 은행잎이 날아왔습니다.

순교를 생각해 봅니다.

파란 눈의 젊은 신부들이 어째서 이 머나먼 땅 조선까지 와서 순교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두 가지 미션을 주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7-39) 이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이곳 조선 땅까지 온 것입니다. “떠나라, 그리고 돌아오지 마라.” 우리도 떠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돌아오지 않을 각오도 되어 있습니까?

출처: 가톨릭평화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