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단상] 197. 라뿌니(스승님)

백형찬(라이문도, 서울예술대 교수)
백형찬(라이문도, 서울예술대 교수)

 

예수님은 훌륭한 교육자이셨습니다. 이는 성경 곳곳에 나와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간음하다 잡힌 여자’입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성전 가운데에 세워 놓고, 예수님께 율법에서는 이런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했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율법대로 돌을 던지라고 할 것인지 아니면 율법을 무시하고 살려 주라고 할 것인지 사람들은 예수님의 대답이 궁금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즉답을 피하시고 땅에 무엇인가 쓰셨습니다. 그런 후에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하나둘, 나중에는 모두 그 자리를 떴습니다. 이 짤막한 이야기 속에는 교육철학, 교육심리학, 교육사회학 등 많은 교육학 이론이 들어 있습니다.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깨닫게 해주는 것입니다.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깨닫도록 하셨습니다. ‘간음하다 잡힌 여자’에서 돌을 던지며 죽이려 했던 사람들에게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며 깨닫게 한 것이 바로 교육자의 모습입니다. 가르치면 잊어버리지만 깨달으면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가르친 것은 단기 기억으로 들어가지만 깨달은 것은 장기 기억 속으로 들어갑니다. 장기 기억 속에 들어간 것은 시간이 흘러도 소멸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원리로 교육하셨습니다.

교육은 영어로 ‘education’이라 합니다. 이 단어 속에는 ‘안에 들어 있는 것을 밖으로 끄집어낸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안에 있는 것은 하느님께서 주신 재능을 뜻합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교육을 ‘산파술’이라 했습니다. 산파란 아기를 받아내는 사람입니다.

산파의 역할은 아기를 건강하게 받아내는 것입니다. 아기는 이미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에 하느님으로부터 과학자, 예술가, 교육자 등의 재능을 부여받습니다. 그러한 아이의 재능을 다치지 않게 잘 이끌어 내는 사람이 부모이고 선생님입니다.

교회의 모든 사람, 특히 사제를 비롯해 수도자, 사목위원, 단체장, 주일학교 교사, 그리고 각 봉사자는 예수님의 교육자적 모습을 닮아야 합니다. 강론할 때도, 고해성사를 줄 때도, 각종 전례에서도, 교회 행정에서도, 직무 봉사에서도 ‘나는 교육자다’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예전에 ‘TV는 사랑을 싣고’라는 프로그램이 방영된 적이 있습니다. 유명 인사들이 나와 어렵고 힘들었던 학창 시절 이야기를 합니다. 선생님의 따뜻한 그 사랑이 없었다면 오늘 이 자리에 있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선생님 덕분에 이렇게 번듯한 사람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애절한 사연이 끝나면 출연자는 무대 뒤편을 향해 선생님을 부릅니다. ‘선생님~’ 이때 음악이 흐릅니다. 처음엔 작게 부르다가 점점 크게 부릅니다. 음악은 더욱 커지면서 드디어 선생님이 무대에 등장합니다. 그러면 출연자는 그 앞으로 달려가 흐느껴 울며 큰절을 올립니다.

이때 시청자들도 함께 눈물을 흘립니다. 사람들은 수학과 영어를 잘 가르쳤던 교사를 찾질 않습니다. 자신이 가장 힘들고 어려웠을 때 용기와 희망을 주었던 선생님을 찾습니다. 그래서 마리아가 예수님을 ‘라뿌니(스승님)’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교회(敎會)의 ‘교’ 자와 교육(敎育)의 ‘교’ 자는 서로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교육자적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은총이 우리를 교육합니다.(티토 2,11-12 참조)

출처: 가톨릭평화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