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단상] 204. 나의 이름은 너의 어머니다

류정호(테레로사, 차<茶> 문화 연구가)
류정호(테레로사, 차<茶> 문화 연구가)

우리 성당 성모님은 요즘 기분이 아주 좋아 보입니다. 해가 뜨면 피어나는 배롱나무 붉은 꽃이 해 저물도록 성모님 눈길 따라 웃고 있어요. 배롱나무꽃은 작은 꽃들이 백일 동안 서로 도와 피어나는 두레꽃입니다. 성모님이 두 손 모을 때 진분홍 꽃숭어리를 떨구는 기도 동무이기도 하고요.

어디 배롱나무꽃뿐인가요. 더위가 눅은 어스름에는 신자들이 성모님 앞에 모여듭니다. 지난 6월부터 파티마 성모 발현 100주년 기념 묵주기도를 드리고 있거든요.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

아가다 할머니의 굽은 등, 데레사 어머니의 곱슬머리, 세실리아씨의 동그란 어깨, 목발 짚은 그레고리오 형제님…. 제각각인 신자들의 모습이지만 함께 드리는 묵주기도의 소리는 하나입니다. 높낮이도 마디도 하나인 기도 소리에 산들바람도 살짝 다가와 거들고요.

요안나 형님의 종아리에 달려들던 모기의 어깃장도 주춤합니다. 신자들과 드리는 묵주기도는 혼자가 아닌, 함께 더불어 가는 세상에 서게 합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추억과 여기 꽃자리와 다가올 세월조차 하나로 통하게 하는 묵주기도입니다.

우리 엄마는 묵주기도로 하루를 시작하셨습니다. 엄마의 알람인 먼동이 희끄무레 밝아오면 기도상의 촛불을 켰습니다. 그리고 벽에 붙은 전지를 손바닥으로 쓰윽 문지르고 앉으셨어요. 성모송을 크게 쓴 모조지가 촛불에 어른거렸거든요. 그리고 묵주알을 굴리기 시작했어요.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

베갯머리까지 스미던 엄마의 기도 소리에 아침잠을 설치곤 했습니다. 엄마의 기도 제목에는 ‘우리 막내 정호가 세례를 받게 해주시고’라는 바람이 먼저였습니다. ‘모든 것은 오로지 마음이 지어내는 것(一切唯心造)’을 지향하던 저는 짐짓 모른 체했지요.

그런데 하루하루 엄마의 기도 소리를 듣다 보니 제가 하는 일이 순풍을 탈 때면 엄마의 기도가 힘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막내딸이 세례를 받던 날, 까만 얼굴 가득 함박꽃이 피어나던 우리 엄마는 지금 하늘나라에 계십니다. 지금 생각하면 오래전 엄마의 묵주기도에 제가 있었고, 지금 저의 묵주기도에는 우리 엄마가 함께 계십니다.

‘모든 것은 마음에서 비롯된다’던 좌우명은 세례를 받고 ‘모든 것은 기도에서’로 바뀌었습니다. 모든 것을 지어내던 마음조차 하느님께서 주심을 알게 된 것이지요. 결정을 내리기 어려운 순간에는 묵주알을 굴렸습니다. 우리 엄마가 하시던 그대로를 따라 하고 있었어요. 촛불을 켜고 묵주알 한 알 한 알에 온 땀을 들였지요.

오래전 결혼에 대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깊은 고민에 빠졌을 때 간절한 기도를 하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찾아가보라던 수도원에서 수녀님들의 기도 소리를 들으며 무릎 꿇던 시각에 엄마의 오랜 지인께서 우연히 집을 찾아왔어요.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아저씨는 제 시아버님이 되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제 결혼의 중매쟁이는 묵주기도였습니다. 그 후로도 걱정이 태산같이 생길 때마다 묵주기도는 언제나 제게 응원을 보내주었습니다.

오늘도 신자들은 성모 동산에 모여 묵주알을 굴리고, ‘기도하라, 또 기도하라’던 파티마 성모님은 우리 성당 성모님과 함께합니다. 이 기도가 끝나면 ‘수험생을 위한 100일의 기도’가 밤늦도록 이어집니다. 이윽고 귀뚜리의 노랫소리만 남을 빈 뜰이어도 우리 성당 성모님은 잠들지 않을 겁니다. 성모님의 이름은 우리들의 어머니이니까요.

출처: 가톨릭평화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