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월 26일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안중근(토마스) 장군 의거다. 1909년 그날,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함으로써 일제 침략상을 세계만방에 알렸다. 의거 직후 일경에 체포된 장군은 체포된 지 151일 만인 이듬해 3월 26일 순국하기까지 많은 옥중 유묵과 자서전을 남겼다.
그중 내 기억에 남아 있는 안 장군의 선교 연설문이 있다. 자서전 일부인데, 그 내용이 인상적이다.
“형제들이여, 내가 할 말이 있으니 꼭 들어 주십시오. 어떤 사람이 혼자서만 맛있는 음식을 먹고 가족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다거나, 또 독특한 재주를 간직하고서도 남에게 가르쳐 주지 않는다면 그것을 과연 동포의 정리라 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내게 별미와 기이한 재주가 있는데 그 음식은 한 번 먹기만 하면 장생불사하는 음식이요, 또 이 재주를 한 번 통하기만 하면 능히 하늘로 날아 올라갈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을 가르쳐 드리려는 것이니까 동포들은 귀를 기울이고 들어주십시오….”
거사 뒤 뤼순 감옥에서 사형 집행을 기다리던 안중근 장군은 자신의 변론을 맡은 일본인 변호사와 간수들에게도 하느님을 믿으면 천국에서 서로 만날 수 있다고 얘기했다. 죽음을 눈앞에 둔 사형수답지 않은 의연한 신앙인의 자세였다. 2010년 순국 100주년을 맞아 우리 교회는 장군을 암살자에서 평화의 사도로, 애국 계몽가로, 참다운 군인으로 그 위업을 새롭게 평가했다.
1897년 1월, 19세 때 뮈텔 주교에게 세례를 받은 장군은 해주를 비롯한 황해도 일원에서 선교 활동을 펼쳤다. 파리외방전교회 빌렘 신부 복사이자 교리교사로서다. 생계가 어려운 이웃을 보면 관청에 진정해서라도 이웃을 돕고자 최선을 다했다.
그러던 중 선교를 위해서는 먼저 글을 가르쳐야 한다고 판단한 장군은 가산을 정리해 진남포, 지금의 북한 남포시에 삼흥학교와 돈의 학교를 세워 계몽운동을 펼쳤고, 국채보상운동도 전개했다.
사형 집행으로 미완성에 그친 「동양 평화론」을 보면, 한ㆍ중ㆍ일 3국 공동 은행 설립과 공용 화폐 통용, 공동 군대 설립을 주창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장군의 동양 평화론은 한ㆍ중ㆍ일 3국의 희생을 강조하는 이토 히로부미의 극동 평화론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미래지향적이고 합리적이었다.
장군의 유지에 따라 사제로 키우기를 원하던 장남 ‘분도’가 사망하고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졌지만, 장군이 남긴 유지는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전해 내려온다. 1899년 대한제국 내부 지방국과 교민 조약을 체결한 당시 교회는 정치적 부담 때문에, 또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 장군과의 관계를 공식화하기는 힘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이역만리를 달려가 장군에게 마지막 성사를 집전하고 성무 집행 정지를 당한 빌렘 신부에게서 우리는 참 목자의 모습을 본다.
“옳은 일을 하고 받는 형(刑)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걸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
어머니 조성녀(마리아)가 아들 안중근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의 내용도 가슴을 절절하게 한다. 한 스님이 일본에서 들여와 알게 된 장군의 유묵 ‘경천’(敬天)은 기도하는 장군을 떠올리게 한다.
대종교와 천도교(동학)인들이 주를 이루는 한국 독립운동사에 장군은 천주교인으로 우뚝 섰고, 교회에서도 장군에 대한 시복시성이 추진되고 있으니 늦었지만 기쁘기 그지없다. 여러 숭모 단체나 기념사업회 중에서도 우리 교회에서 활동 중인 안중근 바보 장학회(이사장 방상만 신부)는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장군의 애국정신과 함께 신앙인 안중근을 일깨워 다행스럽다. 묵주기도 성월이자 전교의 달을 마감하면서 참 신앙인 안중근 토마스 장군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된다.
출처: 가톨릭평화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