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단상] 216. 수양버들과 갈대, 그리고 인간 전뢰진

고종희 (마리아, 한양여자대학교 산업디자인학과 교수, 미술사가)

수양버들과 갈대는 미풍에도 흔들린다는 공통점이 있다. “여자는 흔들리는 갈대”라는 말은 갈대의 이미지에 치명적인 손상을 줬지만 바꿔 생각하면 작은 바람에도 귀를 기울이며, 몸을 굽힐 줄 아는 겸손한 존재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수양버들은 봄이 되면 제일 먼저 나뭇가지에서 잎이 나오며 12월인 요즘도 그대로다. 가을에도 단풍이 들지 않으니 사철나무를 제외하고는 1년 중 가장 오랫동안 ‘푸르름’을 간직하는 나무다. 갈대 역시 생명력이 길어서 이듬해 새 갈대가 사람 키만큼 자랄 때까지도 제자리에 서 있다. 미풍에도 흔들리는 연약한 수양버들과 갈대가 이처럼 모든 나무와 풀 중에서 가장 오래 견딘다는 사실은 역설적이다.

갈대는 햇빛을 받았을 때 그 아름다움이 극치에 이른다. 메마르고 연약한 몸체가 빛을 받으면 마치 빛꽃처럼 신비롭게 변신하는데 아마도 푸르름이 자취를 감춘 겨울 벌판의 황량함을 덜어 주시려고 하느님께서는 갈대를 만들어 주신 것 같다.

전뢰진이라는 조각가가 있다. 그는 대학교수를 지냈고, 예술원 회원이다. 내년이면 90세가 되니 정년한 지 25년이 지났지만 연초가 되면 그분 댁은 세배하러 오는 제자들과 지인들로 시끌벅적하다. 그는 평생 돌조각을 한 대한민국 석조각의 선구자이며, 지금도 정과 망치를 놓지 않고 있는 현역으로서 작가는 오로지 작업으로 말함을 보여 준다. 요즘은 작업 시간이 많이 줄었지만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새벽 4시부터 작업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제자들이 가끔 선생님께 무언가를 제안하면 그분은 으레 “너 그런 거 할 시간 있으면 가서 작업이나 해”라고 말씀하신다. 세상사에는 통 욕심이 없으신 것이다. 이런 그가 작업 말고 평생 한 일이 있는데 바로 제자들이 개인전을 하면 전시장을 찾아가 축하해 주는 일이다. 그를 존경하는 제자들은 공통적으로 선생님이 개인전 때 전시장에 와주신 것에 감사하고 있었다. 그는 교육자로서 본분에 충실하였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제자들을 사랑한 것이다.

선생님은 작품을 직접 만들기 때문에 규모는 크지 않으나 석조의 진수를 보여 주며 역사적인 조명을 받게 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조각가 전뢰진보다 인간 전뢰진에 더 큰 존경을 표한다. 내년 90세를 맞아 제자들이 기념전을 열어 드리기로 하였는데 나는 책 집필을 위해 선생님과 몇 달 동안 인터뷰를 했다. 그분을 알고 지낸 지 40년 가까이 되었지만 술만 드시는 선생님과 밥만 먹는 내가 만나 인터뷰하기가 쉽지는 않았다. 선생님은 늘 작업을 하다가 나오시기 때문에 허름한 작업복 차림인데 지나가는 사람이 보면 그저 가난한 노인으로 볼 것이다.

책의 콘셉트를 잡아야 했는데 인터뷰 초기에는 유령이 나올 것 같은 좁은 지하실에서 작업만 하는 그분의 어떤 점을 보여 줘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깨닫게 되었다. 그는 작은 일,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을 평생 하였음을, 그리고 그것은 매우 소중한 일이었음을. 누구나 살면서 가끔 좋은 일을 한다. 하지만 사소한 일일지라도 한 가지 일을 평생 지속하기란 쉽지 않다. 마더 데레사도 평생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찾아가서 고름을 짜 주고 보살폈을 뿐이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었으나 극소수만이 한 일이다.

수양버들과 갈대를 보면서 전뢰진 선생님이 생각났다.

출처: 가톨릭평화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