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종희 (마리아, 한양여자대학교 산업디자인학과 교수, 미술사가)
수양버들과 갈대는 미풍에도 흔들린다는 공통점이 있다. “여자는 흔들리는 갈대”라는 말은 갈대의 이미지에 치명적인 손상을 줬지만 바꿔 생각하면 작은 바람에도 귀를 기울이며, 몸을 굽힐 줄 아는 겸손한 존재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수양버들은 봄이 되면 제일 먼저 나뭇가지에서 잎이 나오며 12월인 요즘도 그대로다. 가을에도 단풍이 들지 않으니 사철나무를 제외하고는 1년 중 가장 오랫동안 ‘푸르름’을 간직하는 나무다. 갈대 역시 생명력이 길어서 이듬해 새 갈대가 사람 키만큼 자랄 때까지도 제자리에 서 있다. 미풍에도 흔들리는 연약한 수양버들과 갈대가 이처럼 모든 나무와 풀 중에서 가장 오래 견딘다는 사실은 역설적이다.
갈대는 햇빛을 받았을 때 그 아름다움이 극치에 이른다. 메마르고 연약한 몸체가 빛을 받으면 마치 빛꽃처럼 신비롭게 변신하는데 아마도 푸르름이 자취를 감춘 겨울 벌판의 황량함을 덜어 주시려고 하느님께서는 갈대를 만들어 주신 것 같다.
전뢰진이라는 조각가가 있다. 그는 대학교수를 지냈고, 예술원 회원이다. 내년이면 90세가 되니 정년한 지 25년이 지났지만 연초가 되면 그분 댁은 세배하러 오는 제자들과 지인들로 시끌벅적하다. 그는 평생 돌조각을 한 대한민국 석조각의 선구자이며, 지금도 정과 망치를 놓지 않고 있는 현역으로서 작가는 오로지 작업으로 말함을 보여 준다. 요즘은 작업 시간이 많이 줄었지만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새벽 4시부터 작업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제자들이 가끔 선생님께 무언가를 제안하면 그분은 으레 “너 그런 거 할 시간 있으면 가서 작업이나 해”라고 말씀하신다. 세상사에는 통 욕심이 없으신 것이다. 이런 그가 작업 말고 평생 한 일이 있는데 바로 제자들이 개인전을 하면 전시장을 찾아가 축하해 주는 일이다. 그를 존경하는 제자들은 공통적으로 선생님이 개인전 때 전시장에 와주신 것에 감사하고 있었다. 그는 교육자로서 본분에 충실하였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제자들을 사랑한 것이다.
선생님은 작품을 직접 만들기 때문에 규모는 크지 않으나 석조의 진수를 보여 주며 역사적인 조명을 받게 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조각가 전뢰진보다 인간 전뢰진에 더 큰 존경을 표한다. 내년 90세를 맞아 제자들이 기념전을 열어 드리기로 하였는데 나는 책 집필을 위해 선생님과 몇 달 동안 인터뷰를 했다. 그분을 알고 지낸 지 40년 가까이 되었지만 술만 드시는 선생님과 밥만 먹는 내가 만나 인터뷰하기가 쉽지는 않았다. 선생님은 늘 작업을 하다가 나오시기 때문에 허름한 작업복 차림인데 지나가는 사람이 보면 그저 가난한 노인으로 볼 것이다.
책의 콘셉트를 잡아야 했는데 인터뷰 초기에는 유령이 나올 것 같은 좁은 지하실에서 작업만 하는 그분의 어떤 점을 보여 줘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깨닫게 되었다. 그는 작은 일,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을 평생 하였음을, 그리고 그것은 매우 소중한 일이었음을. 누구나 살면서 가끔 좋은 일을 한다. 하지만 사소한 일일지라도 한 가지 일을 평생 지속하기란 쉽지 않다. 마더 데레사도 평생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찾아가서 고름을 짜 주고 보살폈을 뿐이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었으나 극소수만이 한 일이다.
수양버들과 갈대를 보면서 전뢰진 선생님이 생각났다.
출처: 가톨릭평화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