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름진 거울 속의 자신이 낯설다 싶어 또 다른 실체인 나를 빤히 응시한다. 현실이 아니길, 아니 이 모습이 참 나의 모습이 아니길 바라기도 했던 요즘. 그러나 기실은 기쁨과 슬픔, 좌절과 희망도 외부의 요인보다는 다스려지지 않는 자아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리라. 그래. 인정하자. 세월을 거스르는 사람이 있는가. 넋두리가 아니다. 누구도 그러했듯이 나의 푸릇한 청춘은 이제 가고 없다. 그리고 다시는 오지 않겠지.
오른쪽 하지 통증으로 왼쪽 엉덩이만 의자 끝부분에 걸치고 드리는 미사 전례는 나의 현재의 현주소며 엄연한 현실이다. 오른쪽 편의 맨 뒷자리 의자의 오른쪽 끝 10여 센티 정도가 내가 차지하는 유일한 면적이다. 퇴장 성가가 끝나고 만면에 미소를 띠며 기꺼이 악수를 청하는 어르신들의 손이 많아졌다.
할머니들의 주름진 얼굴에 가득 담겨 있는 미소가 이렇게도 아름답다는 것을 내 비로소 병인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물기 없이 마른 손의 미약한 온기가 이렇게 가슴을 훈훈하게 적셔줄 줄 예전엔 상상도 해보지 못했다. 여윈 손으로 반질반질하게 길들인 묵주가 그분들에게는 어떠한 무기보다도 더 강력하고 든든한 기도의 도구일 것이다.
그분들에게도 푸릇하게 빛났던 보석 같은 청춘의 시간이 있었을 것이고 살아오면서 아프고 고뇌하며 하느님과 화해하고 회개하며 다시 일어서는 인생의 고비가 있었을 것이다. 맨 뒤에서 엉거주춤 걸터앉아 힘들었을 나를 위로하려는 가녀린 손. 먼저 내미는 귀한 분들의 손과 인생의 나이테에 잔잔한 감동을 받는다.
늙음에 초연하지 못하는 과도기에 선 지금의 내게는 어떠한 화려함도 인생 선배이자 신앙의 증거자인 그분들의 겸손함을 따를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가장 가난하고 배고프고 병든 이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신 주님. 주님의 선의를 진솔하게 이해하고 행동으로 실천하는 겸손한 모습. 그러함은 현실과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며 결코 명성이 자자한 학식의 소유자나 유려한 달변가에게 나오는 것이 아니다.
드러내지 않고 자아를 다독이며 이타적 삶에다 기도를 얹어 물적 영적 나눔을 실천하는 수수한 이런 분들에 대해 깊은 존경심이 인다. 그런 마음의 순진한 분들의 기도와 미소는 결코 값을 매길 수가 없는 참 겸손지덕의 본보기가 아닐 수 없다. 맨 앞에서 지켜보던 신자들의 모습과 오늘날 맨 뒤에서 지긋이 바라다보는 신자들의 뒷모습은 나의 신앙의 시간여행이며 자아성찰의 귀감이다.
어르신들 말씀에 억지로라도 웃어야 하고, 입맛이 없다는 병인에게는 때려서라도 숟가락을 들려야 한다는 말이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에야 탄성이 나올 정도로 공감이 된다. 아무리 아파도 입맛을 잃은 적이 없는 미식가며 대식가라 자타가 인정할 정도의 내가 밥맛을 다 잃다니 스스로도 믿기지가 않다.
그는 과일을 갈고 여러 가지의 죽을 권했고 입맛이 일 음식을 부지런히 사들였다. 보름 남짓을 그렇게 열심이더니 그도 그만 독한 감기를 옮아 보름을 심하게 앓았다. 완전히 입장이 바뀌어 배우자며 연장자인 그를 이제 내가 보필해야 한다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정신을 차리자. 건강해지지 않으면 그를 간병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목이 부어 넘어가지 않는 음식을 개학이 낼모레여서 밀린 일기를 밤새워 써대던 학생의 숙제처럼 나는 먹고 또 먹었다.
출처: 가톨릭평화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