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단상] 41. 바람이 만들어낸 이야기

정미연 아기 예수의 데레사(서양화가)
정미연 아기 예수의 데레사(서양화가)

 

바람이 분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도 바람의 마음을 예측할 수가 없다. 바람이 만들어낸 나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어느 날 저녁, 연로하신 어머니께서 갑자기 위독하시다. 혀가 말리고 눈이 뒤집히고 호흡이 턱턱 막히신다. 너무 놀라 평소에 가까이 지내는 수녀님께 다급히 전화했다. 양로원에 계시는 수녀님이신지라 자주 있는 일이라며 당신 시키는 대로 침착하게 하라고 가르쳐주신다.

첫째, 숟가락을 수건에 싸서 입에 물리고 둘째, 팔을 쓸어내려 열 손가락을 바늘로 따서 혈을 돌리고 셋째, 다리를 쓸어내려 열 발가락의 피를 충분히 내라고 하신다. 그리고 식구 모두 둘러앉아 온몸을 주물러 드리면서 촛불을 밝히고 간절히 기도하라고 하셨다. 어머니는 삼십 년 동안 관절염으로 걷지 못하신 분이다.

그런 어머니께서 지금 가시면 안 된다고 눈물로 기도했다. 살려주신다면 내 재능을 다 바쳐 봉헌하겠노라 매달렸다. 우리의 간절한 기도가 닿았는지 어머니는 혈색이 돌아오며 빙긋이 웃으신다.

그 주일, 어머니를 위해 병자 봉성체를 부탁드렸다. 계단을 올라오시는 신부님 뒤로 후광이 비춘다. 나의 눈에만 비춘 걸까? 아! 예수님께서 어머니를 위로해주러 오시는 것 같았다. 그때 나는 내 입술이 아니었다.

“신부님! 저의 첫 전시회를 봉헌하고 싶습니다.” 그 당시 서울 세검정성당은 성전 건축을 위해 모두 애쓸 때였다. 아무런 계획도 없이 툭 튀어나온 이 이야기는 황당하기까지 했다. 첫 수확을 주님께 올리듯 첫 전시를 봉헌하고 싶었다. 전시 준비를 할 수 있는 날짜는 50일이었다.

전시도 성당에서 그냥 하기로 했다. 조금이라도 경비를 절약해야 했고 중심을 보시는 그분께 순수한 마음을 드리는 것이 가장 소중한 일이었다. 그 당시 그림에 대한 마음속 불꽃은 깊숙이 잠재워놓고 남편 일로 자식 일로 바쁘게 보낼 수밖에 없는 때였다.

이제 불꽃의 불을 댕긴다.

액자도 만들어야 하고 간단한 리플릿을 만들려면 그림 그릴 수 있는 시간은 사십일이다. 하루에 한 작품씩 만들어야 했다. 전시를 위해 식구 모두 한마음이 됐다. 목말라 있던 열정에 기름까지 부으니 불꽃은 활활 타오른다.

순화의 십자가, 죽음의 언덕, 고통의 성모님, 사랑의 마더 데레사, 기쁨의 노래…. 하루하루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그림들이 쌓여간다. 어느 날, 위층에 살고 있던 짝꿍 친구가 꿈을 꾸었다. 성당 마당에서 새끼호랑이 두 마리가 즐겁게 노는 꿈이란다. 너무 뚜렷했고 뭔가를 예시하는 것 같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단다.

“너는 그림으로 봉헌하고 나는 음악으로 봉헌하라는 뜻이 아닐까?”

“멋진 생각이야! 음악과 함께하는 전시회라니!” 더 힘이 난다.

친구와 가까이 지내는 성악가들의 찬조로 성전 건립 음악회까지 흔쾌히 이뤄졌다. 50일 동안 그림도 액자도 리플릿도 음악회 준비도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간이 벽을 만들어 그림을 걸고 아쉬운 대로 전시장을 꾸몄다. 열심히 보낸 시간이 그림 위에 포개진다.

나만이 알 수 있는 기쁨의 시간과 공간 사이를 비집고 은총의 꽃 비가 내린다. 예쁘게 차려입은 성악가들이 성가를 부르니 그림은 춤을 추고 두 마리 새끼호랑이의 잔치판은 성황리에 벌어졌다. 사심 없이 맑게 봉헌하는 아름다운 이들의 노래는 성당 구석구석까지 스며든다.

고마운 지인들의 작품 구매와 교우들의 정성 어린 음악회 티켓 판매까지 모여 꽤 큰 기금이 마련됐다. 모두의 마음이 합쳐져 이루어진 일이다. 지금도 세검정성당 복도에 걸려 있는 마더 데레사를 볼 때마다 그때의 열정이 다시 살아나 내 마음을 달군다.

출처: 가톨릭평화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