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단상] 45. 어머니의 사랑

정미연 아기 예수의 데레사(서양화가)
정미연 아기 예수의 데레사(서양화가)

 

눈을 감는다.

이 나이에 나에게 사랑의 근원은 어디에 있었을까? 곰곰이 생각을 걸러본다. 바다이기도 하고 대지이기도 한 모든 생명의 근원인 어머니. 살아있는 모든 것들의 어머니! 나에게는 어머니의 사랑이야말로 그림의 시작이었다. 어머니는 신비로운 영감으로 가득 찬 미지의 나라로 나를 데려가셨다.

어머니는 네 번이나 쓰러졌을 때마다 성모님께서 손을 잡고 다시 세상으로 데려주시곤 했다. 삼십 년 동안 관절염으로 걸어 다닐 수 없으셨기에 온통 삶이 기도였다. 손에서 묵주를 떼신 적이 없으셨으니 성모님 사랑을 받으실 만했다.

가난했던 신혼 시절, 그림 그리는 남편 등 뒤에서 “불쌍한 우리 사위, 세계 제일가는 화가 되게 해달라”고 어린애 같은 기도를 눈감으실 때까지 하셨다. 한국 최고도 아니고 세계 최고 화가라니 “엄마의 기도는 너무 과해”라고 하면 “아니다. 아니다. 될 만한 그릇이기에 하는 거다”라고 하신다.

언젠가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아시안 뮤지움에 걸린 남편의 대형 그림 ‘금강전도’ 앞에서 엄마의 기도가 헛되지 않았음을 온몸으로 느끼고 전율했다.

한평생 기도의 밑거름이 되셨고 모든 식구에게 사랑의 씨앗을 뿌리신 어머니의 죽음은 또 다른 시작을 열어주었다. 작은 체구만큼 조촐한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면서 낡은 묵주 책에 메모하신 삐뚤빼뚤한 어문체의 어머니 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자손들을 위한 기도 지향이 어머니체로 쓰여 있다.

발음 나는 대로 쓰인 어머니만의 글씨가 사랑스러워 웃음이 새어난다. 어머니의 기도 위에 딸의 기도가, 딸의 기도 위에 손녀의 기도가 포개어진 묵주기도 책이라면 그게 집안의 보물이 아닐까? 그렇다! 대를 물릴 아름다운 묵주기도 책을 만들어보자! 순간 화살처럼 스쳐 가는 새로운 묵주기도 책이 사명처럼 마음을 두드린다.

긴 세월 기도를 드리면서 ‘왜 우리 그림으로 된 묵주기도 책은 없을까?’ 늘 생각하던 일이었다. 의욕을 앞세워 용맹정진한다. 예수님 일대기를 현대화하고 토착화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가벼이 할 수 없는 일이라 일단 작업을 멈추고 다시 도전하기로 한다. 일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사이 집안에 힘든 일이 일어났다. 내 삶 속에 가장 굵은 대나무 마디 하나가 생겼다. 늦은 나이에 찾아든 삶의 질곡은 예수님의 수난에 깊은 주름을 가슴으로 받아들이게 했다. 자연스레 부끄러운 지나간 나의 죄를 들여다보며 환희의 신비에 진심으로 가까이 다가가고,

빛의 신비에 황홀해 하며, 고통의 신비에 절규함으로써 참으로 영광의 신비 앞에 엎드리게 되었다. 하느님께서는 절묘한 때에 고통을 겪게 하여 자신을 비우게 하는 것과 그 터널을 지나 참된 기쁨을 느끼게 하는 시나리오를 연출하시는 것을 이제는 알 것 같다.

한참 연배가 높으신 신달자 엘리사벳 선생님의 가슴을 두드리는 기도문이 그림과 어우러져 묵주기도 책이 성바오로출판사에서 탄생하였다. 인생의 선배이신 신달자 선생님의 삶 또한 한 편의 드라마다. 기도의 연륜이 녹아내린 깊은 성찰의 기도문은 부족한 그림을 풍성하게 한다.

정교회 소티리우스 대주교님과의 인연도 이 묵주기도 그림 덕이다. 평화화랑에서 출판기념 전시와 현역 여류 작곡가들이 이에 걸맞은 음악을 작곡해 열린 음악회까지 성황리에 열렸다. 이렇게 탄생한 묵주기도 책이 잊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다행히 성 바오로 딸 수도회의 이정아 수녀님께서 그동안 이 책으로 피정지도를 하셨다.

수녀님께서는 신자들을 만나 그림에 얽힌 강의를 해달라는 제안을 하신다. 아이만 낳아놓고 돌보지 못한 엄마의 심정이 이럴까? 고민 끝에 시작해 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또다시 성모님께서 부르신다. 신자들과 그림으로 영적 교감을 나누면서 그림들을 곰곰이 들여다보았다.

그 사이 공부가 되었는지 또 다른 묵주기도 그림이 기다린다. 일련의 일들은 성모님께서 그토록 간절히 바라시는 묵주기도를 신자들에게 안겨주는 뜨거운 열망이실 것이다. 이 부족한 사람이 다시 용기를 내어 성모님을 향한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든든한 격려와 함께….

출처: 가톨릭평화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