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완벽한 평화로움은 없는지 모른다. 그 안에 삶의 그늘이 언제나 섞여 있고 우리가 떨쳐버리려는 불안 또한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면 평화로움은 평화로움 그 자체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경험하는 평화로움은 아주 없지 않아서 “그래 아주 딱 이 정도만” 하는 평화는 그래도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정도의 평화에 오기까지 몇 개의 사막 몇 개의 바다 몇 개의 강을 건너는 기도가 얼마나 젖어 있겠는가.
눈뜨면 성호를 긋고 눈뜨면 고개를 숙이고 눈뜨면 무릎을 꿇고 “오늘도 평화”를 기도하지만 그렇다고 거기까지 오기는 너무나 어려웠고 힘들었다.
나 아직 평화를 모른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나도 그랬다. 나는 평화를 모른다고… 평화는 나와 상관없다고… 언제나 근심이 쌓이고 언제나 고민에 뒤척이고 언제나 온 세상이 나를 버린 것 같은 절망이 익숙하여 나는 평화가 무엇인지 누구인지 그 얼굴과 체취조차 모른다고 우겼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평화는 오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라는 것을 나는 몰랐다. 나이는 나쁜 것이 아니다. 나이는 어떤 스승보다 스스로를 가르치기도 하는 것이다. 내가 절망과 상처로 뒤범벅이던 시절, 그때도 내 안에 평화가 있었다.
그런데 그 얼굴을 잘 바라보지 못한 것이다. 없다고 잘라 말했던 것이다. 그러니 눈뜬장님이 아니었겠는가. 내 평화가 얼마나 서운했겠는가. 알아주지 않는 평화가 배고파 죽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내게 평화가 없었던 게 아니었을까.
요즘 나는 평화를 느낀다. 지금이라고 절망이 없고 허무가 없고 두려움이 없겠는가. 그러나 평화를 느낀다. 내가 평화를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평화를 부르니 평화가 왔다. 나는 젊은 시절 평화가 없다고만 울부짖었으나 평화를 부른 적이 없다.
평화를 부르니 평화가 왔다. 평화는 언제나 있었지만 내가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어느 새벽 나는 너무나 우울해서 새벽 수산시장을 간 적이 있다. 살아 있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펄펄 뛰는 생선들을 다루며 추위를 느낄 사이도 없이 바삐 움직이다가 두 손을 호호 불며 커피를 마시던 한 나이 든 여자분이 말했었다. “이 시간이 젤 평화롭다니까.” 가장 바쁘고 고단한 시간에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노동으로 몸이 녹아내리는 시간 그는 평화롭다고 말했었다.
처음 귀가 열리듯 나는 마음으로 마치 성경 구절을 외듯 혼자 입으로 그 말을 발음해 본 적이 있다. 새벽어둠이 사라졌다. 그때 빛이 터졌다. 그는 평화가 멀리 있지 않다고, 구겨진 삶에 꾸역꾸역 지탱하는 삶 안에서도 평화는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나는 멀었다. 노동으로 몸이 녹아내리듯 힘겨울 때는 하느님을 원망하면서도 기도는 절박했었다. 나는 요즘 평화를 느낀다. 해야 할 일이 산적하고 새벽이 나가 밤에 들어와 누우면서도 마음에 평화를 느낀다. 그런데 이상한 현상이 일어났다.
평화를 느끼면서 나는 기도에 힘이 빠지는 것을 알았다. 사실 나는 삶이 절박했던 만큼 기도도 절박했다. 기도 아니면 죽을 것 같은 때도 많았다. 그러니 매달렸고 사무쳤다. 내 신앙은 먼지만도 못하다. 40년 기도생활이 풀풀 날다가 사라지는 것일까.
왜 살짝 고민에서 벗어나는 듯하면 기도에 힘이 빠지는 것일까. 그리고 살짝 고민에 밀리면 무릎을 꿇는다. 나이가 부끄럽다. 기도는 미루고 미사는 핑계를 대면서 헐렁해진다. 조금 나아지는 듯하면 나는 절박하지 않다. 모든 것이 내 힘으로 다 풀린 듯하다.
이것은 내가 약속한 자세가 아니다. 평화를 가질 자격은 그 소중함의 가치를 지속적으로 느끼는 일이어야 하지 않을까. 나는 지금 진정한 평화에 대해 말할 자격이 있는가 묻는다.
출처: 가톨릭평화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