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학으로 오기 전 샐러리맨 생활을 딱 10년 했다. 서울 을지로3가역에 있는 회사에 7년 반을 다녔는데 매일 러시아워 때에 지하철 2호선 순환선을 탔으니 그 고역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아침에 회사에 당도하면 파김치가 된다. 저녁에 집에 오면 일단 누워 좀 쉬어야 한다.
한여름에는 전동열차 안에서 나를 압박하는 승객들이 더욱 짜증스럽다. “내려요!” 외쳐야만 했던 나날들. 초만원이라 타기 어려워 한 대를 보내고 나면 이어서 온 차에는 더 많은 사람이 타고 있어 난감해 했던 나날들.
와이셔츠까지 땀에 젖어 회사 화장실에 가서 세수부터 했던 나날들. 출퇴근길이 고행이었는데 어느 날 한 명제가 내 뇌리에 박히면서 마음을 바꿔먹고 짜증을 내지 않게 되었다―100년 후에 이 많은 사람들 가운데 누가 살아 있을까?
다 죽고 없을 텐데 내가 왜 이 사람들과의 부대낌을 힘들어하는가. 나도 너도 다 죽고 없고 우리 후손들이 살아가고 있는 세상일 텐데 나와 동승한 이 타인들을 버거워하지 말자. 이렇게 마음을 바꿔먹게 된 계기가 있다.
며칠 업무가 과중했는지 출근길 전동열차 안에서 코피가 터졌다. 내 와이셔츠를 적신 피는 밀고 밀리는 과정에서 다른 사람에게도 살짝 묻었다. 죄송하다는 말도 못 건넨 상태에서 내 피를 묻힌 상태로 그 사람은 나에 앞서 내렸다. 목적지에 가서 옷에 피가 묻어 있는 것을 보고 그 사람은 혼비백산했을 것이다.
살다 보면 본의 아니게 타인에게 실례를 범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사과할 기회를 놓치고 후회하는 일도 있고, 당신이 그런 사람인 줄 몰랐다고 욕을 먹는 일도 있다. 살 부대낌이 짜증스러워 전동열차 안에서 말다툼하는 광경도 많이 보았다.
하지만 나와 함께 같은 전동열차에 오른 사람은 동포요 이웃이요 동시대인이다. 두 사람만 건너면 나와 많건 적건 관계가 있는 사람일 텐데 그 수가 몇천 명, 몇만 명은 되리라.
우리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면서 살 수는 없다. 하지만 마음의 문을 조금만 열면 동시대인은 모두 앞서거니 뒤서거니 죽음을 맞게 될 운명공동체이다.
부귀영화가 무슨 소용인가. 자기 맡은 바 일을 성실히 한 사람은 임종할 때에도 마음이 편하겠지만, 재물을 쌓는 일에만 급급했던 사람은 죽음이 임박했을 때 요소요소에 숨겨두고 쌓아둔 재물을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문제로 고민이 많아 눈도 못 감을 것이다.
지하철을 타면 아무리 마음을 좋게 먹으려 해도 노려보게 되는 사람들이 있다. 껌을 씹으며 딱딱 소리를 내는 사람을 나는 미워한다. 등산복을 입고 한 떼 올라탄 사람들이 큰 소리로 떠들어대면 화가 난다.
연인 둘이 진한 애무를 하고 있으면 일부러 사람들이 보라고 하는 행동 같아서 눈초리가 사나워진다.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마구 펴는 어르신네는 대체로 집에서도 권위적인 가장일 것이다. 지하철을 무대로 전도하는 분들은 지옥 얘기는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신이 자기를 안 믿는다고 엄벌을 내리는 분이라면 겁나서 어디 교회나 성당을 찾겠는가.
타인을 위해 배려를 할 수 있는 공간, 작은 에티켓이라도 지키려고 노력을 하면 그 사람의 인품이 달라 보인다. 나는 지금까지 운전할 줄 몰라 매일 버스며 전동열차를 타고 어디를 가는데 차 안은 많은 것으로 보고 듣고 느끼는 공간이다. 사람을 한자로 ‘人’이라고 쓴다. 자세히 보면 두 사람이 서로 기대고 선 모양이다.
출처: 가톨릭평화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