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단상] 58. 카인의 분노

 

강금실 에스더(법무법인 원 변호사)
강금실 에스더(법무법인 원 변호사)

 

성경은 오직 온유와 겸손, 인내로 마음 안을 가득 채우고 넘쳐서 세상의 관계 속에 드러내고 실천하는 수준이라야 ‘사랑’이라고 했다(1코린 13).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향하여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마르 12,30; 신명 6,5) 사랑해야 한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가르멜의 산길」에서 ‘의지’를 무질서한 집착에서 말끔히 씻어내어 영혼의 기능과 감정과 욕구를 하느님과 합일에 써야 한다고 했다. 무질서한 집착과 감정은 기쁨과 바람과 슬픔과 무서움이다. 하느님과 합일을 향해 영혼을 ‘의지’로 단련시켜야만 온전한 사랑의 에너지 상태로 존재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사랑은 경계가 없고 막힘이 없는 것이어서 그 본질에서는 비교나 경중이 없다. 사랑의 에너지로 존재를 가득 채운 수준에 이르러야, 사심이 비워져 투명하므로 진리가 온전히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나’도 진리를 온전히 알 수 있게 된다. 이것을 ‘어른’이 되는 것이라고 했다(1코린 13,11-12). ‘사랑’은 정신의 궁극적 성숙을 가리킨다 할 수 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고 앙심을 품지 않는 것인데(1코린 13,4-5). 사람의 몸을 통해 태어난 첫 번째 사람 카인은 시기와 분노로 살인을 저질렀다.

하느님은 아담을 내쫓되 가죽옷을 만들어 입혀주었듯이, 아벨을 죽인 카인에게도 벌을 내리되, 표징을 찍어 그 누구도 그를 죽이지 못하게 하셨다(창세 4,15). 그러니 하느님 사랑을 닮으려면 악에 대해 응징은 하되, 악인도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 그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다(마태 5,44).

카인은 하느님의 사랑을 아벨과 비교했고, 분노와 시기로 아벨을 죽이고도 죄책감이 없었다. 하느님이 카인에게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묻자, 카인은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창세 4,9) 하고 말대꾸를 한다.

이것은 자기 존재를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에서 비롯된 반발적 언사이기도 하다. 인정 욕구는 죄책감을 무디게 할 정도로 강렬한 추동력이고, 그만큼 죄악이 문앞에 도사리고 앉아(창세 4,7) 쉽사리 틈을 비집고 들어오게 하는 유혹에 노출된다.

카인의 분노는 우리 생활 속에서 통상적으로 빈번히 일어나는 양태다. 인정 욕구에서 비롯하는 분노와 시기는 그 정도를 달리할 뿐이며 쉽사리 사랑으로 착각된다. 다만 분노를 표출하는 행위만큼은 절제하는 성숙함을 갖춰야 타인과의 관계 형성, 심지어 적대적 관계에서도 공존이 원활해진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에서 가르치는 사랑과 악의 통로로서의 분노에 대한 성찰이 없고서는 올바른 가치기준과 행위 윤리를 갖추기 어렵다.

하느님의 명령을 위반한 아담의 행위를 노아가 하느님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대로 다해서(창세 6,22) 만회했다면, 카인의 말대꾸는 아브라함에 이르러 수정된다. 아브라함은 그를 시험하고자 부르는 하느님에게 “예,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했다(창세 22,1).

아무리 시험이라 해도 자식을 죽이라고 한 하느님이나, 또 실제로 칼을 뽑아든 아브라함이나 너무 잔혹한 게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사람에게서 태어난 첫 번째 사람 카인이 살인을 저질렀으니, 아브라함이 뽑아든 칼로서 생명을 기꺼이 내어놓을 정도의 의지 속에서 죄를 범함과 죄 사함이 대칭을 이루었다는 생각이 든다.

사랑의 가르침에 의지를 내어 노력함으로써 시기와 분노가 살아 움직이는 카인으로부터 아브라함에게로 옮겨가기를 소망해 본다.

출처: 가톨릭평화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