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다의 밀고에 이어 으뜸 제자 베드로도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함으로써 신뢰를 깨뜨렸다. 당시 다른 제자들도 베드로의 소극적 부인과 유다의 적극적 밀고 행위 사이 어디쯤에선가 내면이 흔들렸을 것이라고 짐작해본다. 예수님이 잡혀갔을 때 처벌이 두려워서뿐 아니라, 믿음이 흔들리는 상태였기에 즉각 뿔뿔이 흩어져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마리아가 잔치 식탁에서 예수님께 향유를 쏟아부은 사건은 느닷없이 일어났다. 그래서 상당한 놀라움과 당혹감을 불러일으키고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즉각 자신의 장례 준비를 위한 행위로 의미를 부여해서 곧 다가올 사건과 이를 결합시킨다.
예수님의 언표를 통해 향유 사건은 ‘옥합을 깨뜨리는’ 파국에 그치지 않고 수난과 부활의 창조적 상황으로 옮겨가는 표징으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세속의 눈에는 황당하고 재물을 낭비하는 데 불과한 한 여인의 어리석은 행위가 사랑으로 가득 찬, 영성적 밀도를 지닌 아름다운 행위로 들어 올려졌다.
뜻밖의 사태가 들이닥친 상황에서 어디에도 매이지 않고 사건의 진면목을 꿰뚫어보는 예수님의 자유로운 영혼이 느껴진다.
예수님은 그 자리에서 제자들에게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다(마태 26,11; 마르 14,7; 요한 12,8)고 말씀하셨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 돌려 드려라”(마태 22, 21; 마르코 12,17; 루카 20,25) 하는 유명한 말씀과 결합해서 생각해보면,
예수님은 빈곤 문제를 화폐 경제와 마찬가지로 세속의 원리로 인한 것으로, 하늘나라 일과는 별개라고 보았고 그래서 세속의 시스템에선 해결되기 어렵다고 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제자들이 가난의 해결책으로 생각한 분배적 정의보다는 마리아의 현실적 낭비를 두둔한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실제로 그 후 2000년이 지나도 빈곤 문제는 해결되지 못했다.
실물 경제 관점에서는 낭비에 해당하는 게 영성적 관점에서는 사랑을 위해 아낌없이 내놓는 선물에 해당한다는 것을 향유 사건은 보여주고 있다. 신화학자 나카자와 신이치의 말을 인용하면 전체적인 사회적 사실의 심층에 놓인 영혼의 활동을 드러내는 ‘순수 증여’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이것은 오직 ‘사랑’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예수님은 향유 사건에서 경제 활동의 현실을 초월하는 영적 선물의 세계가 하늘나라의 가치관이며 그것이 가난의 궁극적 극복의 길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메시지를 제자들은 알아듣지 못했다.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한다면서 값비싼 향유를 낭비하고 그것을 자신의 몸에 바르는 행위를 치하하는 예수님의 언동에서 유다는 예수님이 사치를 즐기는 위선자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적어도 자신이 지니고 있는 분배적 정의관과 실물경제의 원리에 비춰볼 때 향유 사건은 결코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정적인 측면을 폭로했다고 여겼을 것이다.
유다의 배신을 성경은 “사탄이 그에게 들어갔다”(루카 22,3; 요한 13,27)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서 광야의 유혹(마태 4,3-11)을 떠올리게 된다. 세상의 모든 나라의 영광, 빵으로 상징되는 경제 활동 모두 세속의 가치관에 속하는데, 이것을 성경은 악마의 유혹으로 묘사하고 있다.
지금 여기에서 세속의 삶을 사는 우리가 하늘나라의 영성적 가치관을 과연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일까. 로마노 과르디니 신부는 저서 「주님」에서 우리 모두는 유다의 내면을 지니고 있다고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다.
출처: 가톨릭평화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