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대한 침묵’이라는 그야말로 영화를 보는 동안에도 긴 침묵을 요구하는 영화가 있었다. 본래 제목은 ‘위대한 침묵 속으로’였다. 그런데 이 하느님의 위대한 침묵은 천지 창조 때 일곱째 날부터 시작하였다. 창세기 2장에 이런 말씀이 장엄하게 기술되어 있다.
“하느님께서는 하시던 일을 이렛날에 다 이루셨다. 그분께서는 하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다. 하느님께서 이렛날에 복을 내리시고 그날을 거룩하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여 만드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그날에 쉬셨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하시던 일을 마치시고 쉬셨다. 그리고 지금도 그 쉼은 계속되고 있다.
그 쉼은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쉬신다면 아무 일도 안 하시고 쉬신다는 뜻인가? 하느님께서는 쉼을 언제 멈추실 것인가? 쉬시는 것을 멈추시면 무슨 일이 생기는가? 하지만 성경은 이런 부질없는 물음에 답해 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하느님께서는 계속 쉬고 계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쉬신다고 아무것도 안 하고 계신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쉼 속에는 그분의 위대한 작용이 있다. 쉬고 계신다고 창조가 모두 끝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창세기의 말씀은 창조하신 일 위에 하느님의 쉼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보잘것없는 겨자씨가 자라서 나무가 되어 그 가지에 새들이 깃든다고 하셨다. 또 하늘나라는 누룩을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온통 부풀어 오르는 것과 같다고 하셨다. 아주 작은 겨자씨를 자라게 하고 누룩이 부풀어 오르게 한 것은 바로 하느님의 힘이다.
하느님의 힘은 겨자씨 위에서, 누룩 위에서 언제나 은밀히 일어난다. “창조하여 만드신 일”인 겨자씨와 누룩 위에 “하느님의 쉼”이라는 힘이 아주 은밀히 작용하시는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노가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일하시고 언제나 쉬신다”고 말한 것은 이런 까닭에서였다.
그런가 하면 마태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는 어떤 사람이 여행을 떠나면서 종들을 불러 재산을 맡기는 것과 같다. 그는 각자의 능력에 따라 한 사람에게는 다섯 탈렌트, 다른 사람에게는 두 탈렌트, 또 다른 사람에게는 한 탈렌트를 주고 여행을 떠났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에서 다섯 탈렌트, 두 탈렌트, 한 탈렌트란 다른 말로는 겨자씨이고 누룩이다. 여행을 떠났다는 것은 쉬었다는 것을 달리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계산을 한다. 주인의 쉼이 끝난 것이다. 그런데 한 탈렌트를 받은 사람은 돈을 불리지 않았다.
그가 한 일이란 다른 사람과 달리 적게 받은 것에 불만을 품고는 내가 왜 일을 안 했는지 적당한 변명을 찾는 것뿐이었다. 달리 말해서 그는 은밀하게 부풀어 오르게 하고 많아지게 하는 하느님의 힘을 거절하였고 무력하게 만든 것이다.
내가 죽음을 맞이하는 날은 하느님의 침묵이 말씀으로 변하는 날이다. 다시 말해 그날은 주인이 돌아온 날이며 내가 그분 앞에서 계산을 해야 되는 날이다. 내가 그분 앞에 설 때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라고 칭찬을 받는다면야 얼마나 좋으련만!
그러나 내가 살아 있는 동안 겨자씨와 누룩처럼 커지고 부풀어 오르게 하는 하느님의 힘을 거부하며 살면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질 저 쓸모없는 종으로 판정 난다. 그러니 내가 지금 숨 쉬고 있는 순간은 하느님께서 나를 만드시고 내 위에서 은밀히 작용하시려고 쉬시는 시간이다. 그래서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나에게 쉼을 주시겠다고 하고 계시지 않는가?(마태 11,28).
출처: 가톨릭평화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