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해 첫날이면 언제나 들려주시는 제1독서의 말씀이다.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민수 6,24-26). 이에 우리는 이렇게 화답한다. “당신 얼굴을 저희에게 비추소서. 당신의 길을 세상이 알고, 당신의 구원을 만민이 알게 하소서.”
하느님께서 당신 얼굴을 비추셔야 복이 있고 우리를 지켜주시며 은혜와 평화를 베푸시고 구원해 주신다고 노래한다. 이것이 새해 첫날의 소망이다.
하느님의 얼굴은 하느님 그 자체를 말한다. 하느님의 얼굴은 볼 수 없다(탈출 33,20-23)고 모세에게 말씀하신 것은 인간은 온전히 순수하시고 위엄 안에 계시는 하느님 자체는 볼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죄를 지었지만 당신의 백성이 가여워 이들을 용서하시고 자애와 호의, 은총과 도움을 베푸실 때 하느님의 얼굴은 우리를 바라보신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이 말씀은 “주님께서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가 아니다. 주님께서는 ‘당신 얼굴을 비추시며’ 은혜를 베푸시고,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평화를 베푸신다.
인간이 결코 뵐 수 없는 분께서 자신을 낮추시어 당신 얼굴을 인간에게 비추어주시고 보여 주신다. 하느님께서 은혜를 베푸시고 평화를 베푸시되 그토록 얼굴까지 친히 보이시며 은혜와 평화를 베풀어 주시다니! 더구나 ‘그대에게’라고 분명히 지정하시면서까지.
그것도 저 멀리 떨어져서 누구를 통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친히 얼굴을 보여주시며 가까이에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은총과 평화를 직접 주신다. 이렇게 받는 은총과 평화이니 얼마나 크고 무한한가?
그런데 그분은 이미 오래 전부터 우리 가운데 계셨다. 예수께서는 해처럼 빛나는 얼굴(마태 17,2)을 우리에게 비추시며 들어 보이셨으며 우리를 먼저 찾아주셨다. 그분은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시다가 열여덟 해 동안 병마에 시달리는 여자를 먼저 눈여겨보시고 가까이 부르셨다(루카 13,10-13).
그리고 빛나는 얼굴을 그 여자에게 비추시고 치유의 은총을 주셨다. 간음하다 잡힌 여자에게도 나타나셨다. 이 여자에게 돌을 던지려는 이들에게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하시자 사람들이 다 떠난 그 자리에서(요한 8,1-11), 빛나는 얼굴은 그 여자를 지켜 주셨으며 그에게 구원과 평화를 베푸셨다.
빛나는 하느님의 얼굴은 이처럼 오늘의 나도 지켜 주시며 나에게도 평화를 베푸신다.
새해 첫날의 제1독서의 말씀처럼 은총과 평화는 거저, 가까이에서, 그것도 빛나는 하느님의 얼굴을 보여주시면서까지 직접 주신 것이다. 그러나 이 은총과 평화는 어디까지나 빌려주신 것이다. 그런데도 이 은총과 평화가 한번 받으면 제 것인 줄만 알고 고마워하지 않는다면, 거저 주신 그분은 얼굴을 돌리시고 거두어 가실 수도 있다.
성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말했다. “은총을 나에게 빌려주신 분이 다시 그 은총을 물려가려고 하면 나에게 남는 것이라고는 육신과 영혼뿐입니다. 이것은 믿음이 없는 자들도 가지고 있는 것들입니다.” 또 성인은 이렇게도 말했다.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이렇게 기막힌 은총을 한 강도에게 주셨다면, 프란치스코야, 그는 너보다 더 고마워했을 것이다.” 그렇다. 언제나 거저 주시는 은총. 정말 열심히 감사드리는 한 해가 되자.
출처: 가톨릭평화신문